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겨울 예찬

2009-01-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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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절이 확실한 한국에서 살다가 캘리포니아로 이민 온 후 가장 그리워했던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겨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남가주 지역에서만 20여년을 살다가 콜로라도로 이사 온 뒤에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겨울의 정취와 낭만을 나름대로 찾게 되었다.

콜로라도의 겨울은 보통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10월말께부터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니 다른 지역에 비해서 겨울이 좀 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이 많이 내릴 때는 하룻밤 사이에 3피트 정도(1미터) 쌓일 때도 있고, 차가운 북풍이 몰아치면 수은주가 화씨 0도 이하(섭씨 영하 20도가량)까지 떨어지기도 한다. 날씨 좋은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가끔씩 뉴스를 통해 콜로라도 지역에 폭설과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걸어 ‘날씨 험한 곳에서 사느라 고생이 많겠다’며 위로(?)를 하곤 한다. 안부전화까지 해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맙긴 하지만 나는 그들의 걱정을 배반하며 오히려 이런 겨울 날씨가 좋다고 대답한다.


겨울 공기는 너무도 차갑고 신선해서 아침에 심호흡을 하고 나면 가슴 가운데 교묘하게 숨어 있었던 정결치 못한 생각들까지도 다 정화시켜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침 출근 길 차 시동을 걸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내쉬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추운 날씨는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만든다. 일년 내내 여름인 곳에는 계절에 따라 별로 준비할 것도 없지만 4계절이 확실한 지역에 살다보면 계절에 따라 준비해야 될 것이 많아서 자연적으로 부지런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이 오기 전에 월동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겨우 내내 고생을 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습관화되는 것이다.

겨울풍경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가는 것은 벽난로 가에 가족들이 둘러앉아 따듯한 애플 사이더를 마시면서 하루 동안 아이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고, 또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모습이다. 집밖에는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도 집안 벽난로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큰 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막내딸의 재롱에 녹아나고, 아들 녀석과는 스키, 스노보드 타는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허락하신 지상 낙원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

눈보라를 지나간 후 날씨가 개어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고 산과 들은 온통 은세계로 변해 있는 날이면 나는 영락없이 영화 ‘닥터 지바고’를 떠올린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할 때 보았던 이 영화의 여러 장면에 대한 기억은 장성한 후에도 마음에 각인돼 남아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겨울의 나라’ 러시아를 기필코 찾아가 그곳에서 벽안의 러시아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영화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자문해 보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함께 영어 자막이 있는 겨울연가 드라마를 밤새워 보면서 눈물로 이불을 적시기도 했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저런 슬프고 아름다운 절대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반드시 겨울을 배경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겨울의 낭만과 독특한 정취가 좋다. 그리고 이제는 길고 긴 겨울의 고독과 적막함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깊은 겨울밤에 느끼게 되는 고독감은 자신을 바쁘고 분주함 속으로 몰아가는 일상으로 부터 벗어나 진정한 나의 내면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백승환
(목사·예찬출판기획)

baeksteph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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