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2009-01-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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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redemption)을 전한다.”

미국의 한 영화 비평가가 던진 말이다. 영화뿐만 아니다. 인간의 모든 예술행위가 사실은 구원을 갈망한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려는 시도다. 수많은 노래와 드라마, 소설과 시가 잃어버린 완전한 세계, 그 영원한 본향을 그리워한다.

나는 딸아이가 엄마의 자궁에서 까만 머리를 바깥으로 쑥 내미는 순간을 지켜봤다. 그때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이 아이는 지금 어디서 이 세상으로 들어오는가?” 엄마 뱃속은 그 아이의 ‘원산지’가 아니다. 자궁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인큐베이터일 뿐이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당신은 어떻게 지금 여기 와 있는가? 수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저편 어딘가에서? 아니면 땅 속의 한없이 깜깜하고도 깊은 어둠 가운데서?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신을 잊었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잃었다는 말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이 문제를 제쳐놓고는 인간의 어떤 탐구도 궁극적인 답이 되지 못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넋두리들이 그 증거다. 그래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의 의미는 세계 밖에 놓여 있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절대진리가 무시당하는 다원주의 시대다. ‘감각’과 ‘즉흥’에 맛들인 개개인의 ‘기호’가 왕처럼 대접받는다. 새롭고 실용적인 정보냐 아니냐에 따라 지식의 값어치가 매겨진다.

인터넷은 지식정보의 홍수를 이루며 매일 엄청난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쏟아낸다. 그러나 무엇이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인지를 흐리거나 바꿔치기하는 악역도 떠맡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조금씩 아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라도 확실히 아는 것’, 다방면의 얕은 지식보다 하나라도 딱 부러진 ‘심오한 확신’이 필요하다.

현대인은 지금 무언가 부족하다. 한때 유행한 CF 카피의 한 토막처럼 그저 각자 ‘노는 물이 다르다’거나 ‘2퍼센트 부족한’ 정도가 아니다. 무언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빼앗긴 상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의 답을 내놓는 데 이처럼 무력할 리가 없다. 인간이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이 땅에서 찾지 못한다면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 상실의 마지막은 ‘심판’이다.

예술가나 철학자들뿐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구원을 찾아 헤맨다. 신의 최후 심판을 미리 알거나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단지 잃어진 상태 그 자체가 고통스러워서다. 왜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다. 무엇을 원하는 지도 모르는 채 무언가를 끝없이 원하고 있는 그 ‘공허한 갈증’.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짊어져 온 멍에요 혼자서는 풀지 못할 딜레마다.

진리는 인격이다. 그래서 인격적인 절대자와의 만남 없이는 진리도 없고 구원도 없다. 앞으로 이어질 ‘복음 이야기’는 바로 그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작고 미세한 증언이다.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2-13)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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