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계영배(戒盈杯)

2009-01-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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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근(무궁화상조회)

덕담을 주고받는 정월(正月), 기축(己丑, 2009년) 새 해가 밝았다.
금년에는 “마음을 비웁시다”라는 인사로 덕담을 주고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계영배’를 소개한다. ‘계영배’란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란 뜻으로 잔의 7할(割) 이상 술이 차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리는 요술같은 잔이다.

우리나라에서 계영배를 만든 사람은 ‘유명옥’으로 전해진다.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질그릇을 구워 팔던 ‘우삼돌’의 꿈은 사기그릇을 만드는 것이었다. 우삼돌은 사기그릇으로 유명한 분원으로 가 ‘지외장’의 제자가 되고 8년의 각고 끝에 스승도 이루지 못한 ‘설 백자기(雪 白磁器)’를 만드는데 성공, 설 백자기로 만든 반상기가 왕실에 진상됐다.설 백자기의 아름다움에 경탄한 왕은 스승과 삼돌에게 새 옷을 만들어 입히고 삼돌이에게 ‘명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유명옥’은 갑작스런 유명세를 이기지 못하고 주위의 꼬임에 넘어가 주색잡기에 빠지게 돼, 예술 혼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교만한 기교만 부리다가 얼마 못 가 시정의 주정뱅이로 전락한다.다시 질그릇 장사로 전락하게 될 위기를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다시 살아나게 된 유명옥은 “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몸이다. 열심히 연구해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릇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족을 모르고 넘치면 모두 잃는다는 뼈저린 깨우침과 장인정신이 담겨있는 조그만 술잔 하나를 만들어 스승에게 바쳤다. 이것이 바록 계영배다.

7할(割)이 넘으면 모두 흘려버리는 계영배를 교훈삼아 욕심을 경계하여 자기의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 자족할 줄 알아야 겠다.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다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교훈의 잔이다.이 술잔을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1779~1855)이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 술잔에는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 = 가득 채우지 말기를, 너와 같이 죽으리라”라는 글을 새겨놓고
임상옥은 이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끝없이 솟구치는 과욕을 다스리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또한 이 계영배는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 시절 많은 외빈들에게 선물했다. 주한미국대사의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는 크리스토퍼 힐(미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 담당 차관보)에게 계영배의 뜻을 설명하며 선물하자 그 잔의 의미에 놀라움을 표현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때 북한측에 과도한 욕심을 버리라고 설득하면서 이 계영배의 비유를 들어 설득했다고 한다.계영배를 사무실 책상 앞에 두고 있는 주식회사 ‘농심’ 회장(손 욱)은 회사는 스스로 70% 밖에 채울 수 없다, 나머지 30%는 고객이 채워주는 것이라며 “시장(市場) 앞에 겸손해야 하는
것이 일등 회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라고 말한다.

비우는 것이 만족의 첩경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이 인생을 크게 사는 법이다. 다시 한번 “분수를 지키자”고 덕담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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