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말과 새해 풍경

2009-01-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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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작년 겨울 12월 마지막 날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안에 떠있었다. 지구 반대편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니 해가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나고 또 한 해가 바뀌었다.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강력한 펌프 역할을 하며 뛰고 있는 심장박동처럼 시간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지난 해 철새처럼 날아가서 한국에서 보낸 연말은 각본 없이 진행된 생생한 드라마였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에서 떠오르는 신흥귀족의 친지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 집에서 벌어지는 연말 풍경으로 인해 나는 이질적인 문화충격으로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 집에 선물 꾸러미들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영광굴비 10마리에 250만원, 멸치 한 상자에 100만원, 송이버섯 등 특산명품들이 이 집 현관에 산더미 같이 쌓이고 있었다.
이 집 주인은 그 답례로 한 세트에 70만 원짜리 한우를 여러 집으로 선물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놀라서 이 비싼 음식들이 목에 넘어가느냐고 물으니 이 집 마나님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극소수 부유층의 과소비는 엽기적이다. 한국의 금권과 권력의 야합의 뒷거래는 이 정도의 선물공세는 새 발의 피라고. 사과상자에서 차떼기에 이르기까지 돈을 넣는 방법 외에 다양한 뇌물 공세 수법이 있다고 했다. 뇌물수수의 부패는 끊을 수 없는 기업생명의 연결고리라고 한다.


서구로부터 들여온 물질만능주의를 신기루를 쫓듯이 모방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은 대 나무통속처럼 비어있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쌓아놓아도 소금물을 마실수록 목이 마르듯이 돈에 대한 욕망과 갈증은 가시지 않는다. 어느 날 하루, 내가 외출하려고 문밖에 나오니 진 회색 벤즈 600 승용차가 호화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중년기사가 공손히 절을 한 후 자동차 문을 열어준다. 자동차에 올라타니 오디오 시스템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 흘러나온다.늘 운전석에서 자동차 물결 사이를 누비며 직접 운전하던 내가 뒷좌석 부드러운 가죽의자에 기대 앉아 있으니 한국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돈 많은 마나님 역할 같아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잠시 혼란스러웠다. 운전기사가 말을 이렇게 건넨다.

“이런 외제차를 유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요. 가벼운 접촉사고로 자동차 문짝이 쭈그려졌는데 한국에서는 부속품을 구할 수가 없어서 독일에서 기술자가 문짝을 들고 직접 출장을 왔어요. 그런데도 돈 많은 부자들이 신분 과시용으로 서로 외제 수입 차량을 사서 타고 다니고 있지요.”한참 열변을 토하던 운전기사가 “어디로 모실까요?”하고 묻는다. “남대문 시장으로 가요” 나의 대답에 운전기사는 당혹스러운 눈치다.
한국 귀족들이 드나드는 고급백화점이나 골프장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나를 실어다 준 곳은 남대문시장이다. 뻥 뚫린 천정으로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재래시장바닥에서 김이 피어오르는 돼지 머리를 써는 아주머니, 목이 터져라 소리치는 장사꾼들의 외침, 이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삶의 절규가 있을까?

이곳은 또 다른 한국 밑바닥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인 연말 풍경이다. 작년 연말의 끝자락인 마지막 날,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산 김, 멸치 등을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에 싣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재래시장의 생선 비린내도 함께 묻어왔다.

올해의 연말과 새해는 나의 현주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를 VIP 대접을 했던 친지 집에서 새해 인사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중소기업의 경영권을 틀어쥐고 있는 여성 경영자다. 경기침체로 벼랑 끝에 서있는 것 같이 불안하여 밤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한다.
그동안 미국의 거대한 금융들이 파생상품으로 모래성을 쌓는 동안 한국도 공중누각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기업들과의 경쟁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기와 과소비의 거품을 걷어내는 뼈를 깎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거창하지만 전화로 걸려온 새해 인사말이다.

올해 미국에서 보내는 나의 연말과 새해의 풍경은 묵화처럼 어둡고 칙칙하다. 그래서 벌써부터 수채화 그림 같은 화사한 봄이 기다려진다. 너무 성급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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