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서재필 박사를 추모하며

2009-01-0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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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종(알파인연합감리교회 목사)

한국 이민의 영웅이라고 할수 있는 애국지사 서재필 박사는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에 있는 노리스타운 몽고메리 병원에서 외롭게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서재필 박사는 한국인으로 첫 이민이며 첫 의사가 되였고 1890년에 첫 시민권을 취득한 한국이민의 선구자이다. 그는 미국에 돈을 벌러 온 것도 아니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온 것도 아니였다.

우리 나라의 앞날이 풍전등화 같았던 이조 말기에 애국심에 불타던 청년 서재필은 1884년에 20세의 젊은 나이에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이라는 개혁운동을 주도하다 실패하여 역적으로 몰려 일본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일본으로 망명간 그는 마침 한국으로 들어오려고 준비중인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나 1885년 4월에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전전긍긍 고생 끝에 홀랜백이라는 석탄 재벌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동부로 와 공부를 하게 되었고 18세 때에 과거에 합격 했던 명철한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였고 미국에서는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1895년 11월 조선 정부의 내부에 세력의 변화가 와서 그를 불렀을 때 조국을 위해 봉사할수 있는 기회가 오자 지체하지 않고 귀국하여 4년 동안 조국의 개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였다.짧은 4년 동안에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을 한글로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함은 물론 한글
선양 운동을 시작했고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등 미래 조국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불가불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 그는 첫 한국인으로서 의학계에 눈부신 활동을 하였고 3.1독립 운동때는 미국에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가지로 활약하였다.

그런 서재필 박사에게 8.15 해방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이었겠는가? 1947년 7월 미군정 최고 고문관으로 귀국하여 혼란기 한국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으니 그 때 나이는 이미 83세였다.서재필 박사는 역적의 누명을 씌우고 삼족을 멸하는 엄청난 고통을 준 조국을 배신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사랑하였으니 그는 최초의 미국 이민으로서 나라 사랑의 최고의 본을 보여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요, 우리들의 “롤 모델”이다. 그의 기일인 1월 5일을 맞아 그의 후배 이민의 한사람으로서 훌륭한 사표를 보여준 그를 추모하여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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