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별적인 역사

2008-12-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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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교육가)

‘ID 카드 플리즈’ 티켓 판매원의 말을 듣고 냉큼 카드를 제시한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유쾌하였다. 오래 전이 일이고, 요즈음은 이런 일이 없어서 섭섭하다. 연장자에게 반값을 받는 서비스 창구에서 있던 일이다. 나이만큼 지나온 역사가 지금은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기 때문인가.그렇다고 나이가 많아지면 그만큼 즐거움이 줄어드는가.

그것은 아니다. 젊었을 때와 다른 즐거움이 있다. 혼자 있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산과 바다에 가거나, 일을 하거나 쉬거나… 거기에는 독특한 즐거움이 있게 마련이다. 나이에 따라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나이가 많아지는 것을 염려할 필요 없이 마음 편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그렇다고 하더라도 나이가 많아져서 느끼는 즐거움은 대체 무엇일까. 그 으뜸은 역사 체험의 두께이다. 인류사, 민족사, 생활 문화사, 그리고 개별적인 역사가 있다. 텔레비전도 처음부터 색채가 있던 것이 아니고, 통신 방법도 처음부터 셀폰이 있던 것이 아니고, 교통 방법도 처음부터 비행기가 있던 것이 아니다.


우주 여행을 하게 된 과정은 어떤가. 무엇이나 발전과정, 소멸과정을 지내면서 오늘에 다달았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시대와 더불어 이런 발전사를 직접 체험하였다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이것이 바로 즐거움인 것이다.
필자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왔다면 재미있게 듣는 사람이 많다. 어렸을 때 양말이 다리에서 흘러내려 고생하던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갸웃거린다. 요즈음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는 아무개가 어렸을 때 아주 장난꾸러기였다고 하면 ‘어쩌면’하는 소리가 난다. 옛날에는 IN이런 물건이 없었다고 하면 예사로운 일에 감사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모든 현상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고 즐거움이다.

역사 중에서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사도 귀중하다. 옛날 문벌있는 가정에 꼭 있어야 했다는 ‘족보’ ‘문집’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지나온 과거가 있다. 아기 때,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등을 거칠 때의 크고 작은 일화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노년기의 자랑이다. 얼마나 풍부한 자산인가.

요즈음은 기록 저장 방법이 가지 각색이다. 사실을 종이에 기록하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고, 인터넷에 저장하는 방법이 흔히 쓰이고 있다. 그것도 글로만 남기는 것이 아니고 그림이나 사진이나 음성으로도 기록하는 방법 등이 있다. 소위 입체적인 방법이다. 이런 현상은 오래 전에 타계한 분을 다시 만나볼 수 있고, 그의 말도 되살릴 수 있는 시대이다. 그 뿐인가. 때로는 고인의 정자도 저장할 수 있으니… 세상의 변화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세모, 즉 일년의 마지막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과 몸이 바쁘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그동안 빚진 것을 갚으러 다니는 것을 보았다. 올해는 이 일을 월스트릿 사람들이 해야 할 것이지만 그들의 탐욕은 그런 예의조차 모르는 것 같으니 한심하다. 보통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올해의 토픽을 정리해서 기억의 수첩에 기록 저장하는 일이다. 노년기에 있는 사람들은 이 일을 하는데 신이 나며 그들의 개별적인 역사가 좀 더 두꺼워진다. 이렇게 해서 매년 첨가된 개인의 역사는 나이가 많을수록 두껍고 내용이 알차고 다양하게 된다. 이 중의 어느 것은 개인을 벗어난 큰 사회 역사의 일부분하고 겹치거나 개인만의 특종이 되기도 한다. 또한 개별적인 역사는 대종을 이루는 큰 역사의 뒷받침이 되어 실지로 증명도 하고 때로는 부분적인 의문을 표시하기도 하면서 큰 역사의 권위를 세우는데 도움을 주게 된다. 개인 역사가 공헌하는 길이다.

하여튼 인류의 역사는 이어지고 각 개인의 존재는 역사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연말이란 알게 모르게 이런 조류에 휩싸이면서 각자의 한 해 생활을 정리하는 계절이다. 많은 것 중에서 값진 것을 찾아내고, 흐트러진 것을 가지런하게 바로잡는 작업은 마음을 비워 여유롭게 한다. 그런데
오늘 내리는 올 겨울 첫 눈은 어느 기록 상자에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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