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촛불을 켜고 싶다

2008-12-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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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옥(MOMA 근무)

아주 어렸을 적 우리가 동대문 근처에 살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와 나는 동네 골목길을 지나 전차가 보이는 넓은 거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갑자기 길목 저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어느 덧 점점 커지는 소리와 함께 구슬픈 곡(曲)을 따라 화려한 꽃마차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처음 보는 상여였다.길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재수 없다며 등을 돌리고 침을 뱉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속삭이이셨다. “우리 같이 안녕히 가세요 하자.”

어머니의 음성은 곧바로 내 어린 마음에 와 닿아 나는 그 뒤로 상여를 볼 때마다, 또는 특별한 까만 차를 볼 때마다 안녕히 가세요 하는 것이 내 일생 습관처럼 되어버렸다.내가 매일 타고 출퇴근하는 버스에 고정적으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언제부터인지 한 사람, 또 한 사람 안 보이기 시작하는 공허를 느끼게 될 때가 있다. 늘 앞자리에 앉아 노란색 펜으로 줄마다 쭉쭉 칠해가며 책을 읽던 유대인 할머니, 붉은색 머리에 너무나 잘 맞게 항상 멋진 구두를 신고 역시 근사한 신사 남편과 그 날의 스케줄을 의논하던 성공적 성형수술의 표본 할머니, 은퇴하고 자원봉사로 일하면서 오페라, 연극, 미술관 등을 모조리 정복하고 다닌다던 젊은 82세의 할머니, 파리에서 오래 살고 지금은 뉴욕시내 유명 백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바로 우리 아파트 길 건너에 살고 있는 여인, 버스에서 큰 목소리
로 그날 저녁 무엇을 먹을지 셀폰으로 길게 지시를 하다가 무안을 당한 할아버지(주변 사람들이 후식까지 제안하는 등 유쾌하게 끝났지만).


조용히 앉아 그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내게 안녕히 가라는 기회도 안 주고 그들은 떠나버렸다.지금 현대미술관(MOMA)에서 전시 중인 반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별이 빛나는 밤(Starry Night)’. 왼쪽 귀를 자른 뒤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1889년 그린 이 그림은 회오리치듯 작렬하는 별과 그 별빛 아래 조용한 기억 속의 마을을 그려넣은 그의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다.별을 볼 때는 언제나 꿈을 꾼다고 그가 동생에게 말했다. 10여년 전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불란서 남부의 그 병원을 찾아갔었다. 별이 있는 밤을 그리던 날 함께 그렸던 올리브 나무가 병원 앞 넓은 터에 그득히 자라고 있었다.

왜 그토록 그가 가엾고 존경스러웠던지 -. 이미 늦었지만 난 눈물을 줄줄이 흘리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안녕히 가세요.12월 달력에 여기 저기 동그라미를 치면서 밤하늘을 내다보니 오렌지색 둥근 달이 별들의 호위
를 받으며 나를 감싸주고 있다.웬지 조금 허전해지며 으시시 추워진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지. 이제 곧 새해가 오고 있지 않는가. 다음 해 12월에도 내 창문에 틀림없이 걸려있을 저 달과 별들을 잊지 말고 마중해야지.신석정의 시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를 떠올리며.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녹색의 침대에 누워서/남은 햇빛을 즐기노라고 돌아오지 않고/조용한 호수 위에는 인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애기의 잠덧이 있습니다/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

기억력은 12월에도 장미를 본다고 했던가. 나는 내 12월 가슴 속에 따뜻한 촛불을 켜 놓고 새해를 맞이할 장미를 한 아름 들여 놓으련다. 그리하여 나와 인연이 맺어진 모든 이들에게 새해 소망이 듬뿍 들어있는 한 송이, 한 송이 안겨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으련다.염원과 사랑과 희망의 촛불을 켤 때가 지금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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