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우고 낮추는 일만 남았다

2008-12-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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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생명의 원천인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흐르는 물은 낮은 자리, 빈 공간에만 고인다. 제가 놓인 위치 보다 높은 곳으로는 흐르지 않으며 자리가 비어 있지 않으면 고이지 않는다. 우리는 오랫동안 가득 찬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달도 둥글게 가득 찬 ‘만월’이 좋고, 꽃도 활짝 핀 ‘만발’의 상태를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찬탄한다. 음식을 많이 먹고 배부른 상태를 ‘만복’이라 하며 흡족해 하고, 모든 걸 통 털어 흐뭇한 감정을 ‘만족’이란 말로 표현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을 비워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마음은 정신이란 말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정신을 비우면 정신없는 사람, 정신 나간 사람이 되는데 이건 큰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여기서 가리키는 ‘마음 비우기’는 사리의 판단과 사고, 감정 활동을 중지하라는 게 아니고, 똥창까지 꽉 차는 욕심을 버리라는 함의가 담겨있다. 인간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되어 가면서 날로 부풀어 가고 있는 간교한 마음과 허망한 야심을 털어내고 본래의 순수 상태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2500년 전 노자의 무위철학과,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19세기 잔 자크 루소의 자연주의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커피 잔이 비어 있어야 커피를 담을 수 있고, 술잔이 비어 있어야 술을 부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이 비어 있어야 사람의 도리가 들어설 수 있다. 선입견,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이나, 출세, 돈이라는 욕심으로 메워진 마음자리에는 사랑과 자비, 도(道)와 공생의 화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마음의 여백을 빼앗긴 대뇌피질의 팽팽한 신경회로는 스트레스를 쌓는 창고가 되기에 안성맞춤일 뿐이다. 마음속에 꽉 차버리는 이태리 오페라식 사랑은 극도의 긴장과 비통과 죽음의 종말을 가져온다. 토스카의 ‘별이 빛나건만’이나 사랑의 묘약 중에서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 그 대표적 예다.

사랑하되 상대가 마음 놓고 들락거릴 수 있는 빈자리를 남겨 두는 여유가 우리네 옛 선비들의 사랑 법이 아니었던가. 황진이를 스쳐 지나가는 화담 서경덕, 황진이 무덤 앞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임제의 사랑 같은 것 말이다. 운동선수가 운동할 때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라. 모든 운동의 기본자세는 낮춤으로부터, 몸의 힘을 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역도 선수가 용상으로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릴 때, 정구 선수가 상대방의 공을 받기 위해 수비 자세를 취할 때, 럭비선수가 스크럼을 짜고 댓
쉬하며 밀어붙일 때의 자세는 한결같이 무릎을 꾸부린 낮은 모양을 하고, 어깨와 목, 팔, 다리는 유연하게 힘을 빼고 있다. 골프가 안 맞을 때 속상해하며 가장 많이 투덜대는 용어가 “힘이 들어갔다”는 말이다. 목에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면 오히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게 되는 게 인간의 신체구조다. 우주의 생체 리듬이라고나 할까. 초조, 불안, 갈등, 미움, 원한을 비워내야 기쁨과 의욕, 사랑과 희망이 들어설 수 있음은 정신세계의 기맥(氣脈)이다.

하느님의 은혜와 부처님의 자비도 낮은 곳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갈구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것이 아니던가. 젊었을 때 나는 속을 채우는 일에만 열심이었다. 나 자신을 언제나 세상의 중심에 두려고 안달을 떨었다. 그러니 아등바등 싸울 일이 많을 수밖에. 미움도 많았고 갈등 속에서 고뇌의 날을 보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제 비우고 낮추는 일만 남았다.
삶의 마지막은 속 빈 껍데기만 남는다는 이치를 점점 깨달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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