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살아있음이 행복이어라

2008-12-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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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논설위원)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혹은 한발 한발 죽음의 고지를 향해 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주위의 사람들이 죽어서 관에 들어가 땅 속에 묻히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하고는 무관한 것처럼 여긴다. 언젠가는 자신도 죽어 그들의 뒤를 따라가야 함은 기정사실인데도 그것이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12월이 얼마 남지 않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또 한 살의 나이를 더 먹게 된다.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는 것은 늙음의 확인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즉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음의 문턱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이 먼 요정의 나라 일인 것처럼 생각한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한 번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만하다.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기에도 종교와 철학에 심취하여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나이가 많아도 사는 것이 너무 바쁘고 즐거워 죽음이란 단어의 ‘죽’자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혹은 종교에 따라 죽음을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장자는 죽음을 자연의 운행으로 보았다.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이 변하듯이 죽음도 그 운행처럼 보았다. 죽음이란 형체가 없었던 것이 생기어 삶이 되고 다시 삶이 형체가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 때 장자는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 그의 친구 혜자가 장자에게 문상을 갔는데 이 모양을 보고 꾸지람을 한다. 아내가 죽었는데도 슬프게 곡은 하지 않고 무엇이 그리 좋아 노래를 부르냐고 한다. 장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기 이전엔 형체도 기도 없었고 삶도 없었다.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변해
서 기가되고 형체가 생기며 삶을 갖추고 사는 것이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음이란 이 형체가 변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며 “아내는 지금 천지(하늘땅)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있는데 내가 소리를 질러 울고불고 슬퍼한다면 나는 하늘의 운명을 모르는 것이라 생각되어 곡을 그쳤다”고 말한다. 장자의 외편 중 ‘지락’편에 나오는구절이다. 이렇듯 장자는 죽음을 삶이 온 곳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았다.
고등종교에서의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신이 사람이 되어 사람을 구원하러 온 종교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의 죄를 구속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어 무덤에 들었으나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한
다. 부활하여 영생한다. 영생의 종교가 기독교다. 죽음을 넘어선다.
기독교의 부활사상은 교리의 핵심이다. 기독교는 죽음을 또 다른 삶의 시작으로 본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기독교의 부활사상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죽지 않고 영생을 얻어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간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희망의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불교는 사람에게 전생과 현생과 내생이 있다 한다. 윤회다. 전생에 다른 동물이었는데 현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현생에 사람의 삶을 살았어도 죄업을 지어 죽으면 내생에는 다른 동물이 되거나 벌레 같은 것으로 태어난다. 윤회를 끊는 것이 있다. 해탈이다. 열반이다. 해탈과 열반에 들면 영원한 극락에서 윤회 없이 살아간다. 불교도 죽음을 넘어선다.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어 있다. 즉 내가 죽으면 인식을 하지 못하니 모든 것이 나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죽은 사람과 연계됐던 모든 관계는 끝이 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관계의 영속성이다. 나는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면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삶이나 죽음을 하나로 볼 수 있다.

영원과 순간이 둘이 아니듯이. 나무와 숲이 둘이 아니듯이. 파도와 바다가 둘이 아니듯이. 동전의 양면이 별개의 것이 아니듯이.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해 가는 하루하루의 행진이다. 그렇지만 그 죽음 너머에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있다. 아니, 사람은 삶과 죽음을 매초 매시간 경험하며 살면서도 그것을 모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이다. 날숨과 들숨의 순간순간의 이어짐이 연결 안 되면 바로 죽음이다. 죽음 후, 그때 생각하자. 살아있음이 행복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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