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어는 생존전략의 무기

2008-12-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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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불경기의 칼바람이 부는 뉴욕의 겨울 밤, 컨추리 클럽에서 연말 골프모임이 있었다. 칵테일 시간에 내 옆에서 우아한 옷차림의 나이든 백인 여자가 치즈를 얹어 놓은 슈크림용 빵을 접시에 담고 있다. 그녀에게 치즈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스모크 모짜렐라 치즈이며 고급 와인과 궁합이 잘 맞는 안주라고 내게 살짝 일러준다. 치즈 종류도, 맛도 모르는 나에게 그 치즈 이름은 생소할 뿐이다 저녁시간이 되어 모두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모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백인들이다. 우연히도 나의 식탁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모두 인도계 이민자들이다. 인도인들이 둘러앉은 둥근 식탁은 지구 반대편 망망한 인도양에 떠있는 서남아시아의 거대한 땅덩어리와 같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송년의 밤이 깊어가면서 우리 자리는 파키스탄과 인도의 핵무기 무장과 피비린내 나는 지역분쟁 이야기로 시작되어 글로벌 경제 이야기로 불꽃을 튀겼다. 앞자리에 앉은 40대 후반의 인도계 심장내과 의사 부부는 태어난 지방의 언어가 달라 그들의
언어로는 전혀 소통이 안돼 영어로 이야기 한다고 한다. 그들은 영국식 발음의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는 인도인구의 10%에 속하는 상류층의 신분이라고 말한다. 인도의 공식 언어가 18개이며 200개 이상의 언어가 공존한다고 한다.


영어는 인도 대륙에 흩어져있는 방언을 묶어주는 공통언어다. 인도는 식민지 지배국이었던 영국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착취를 당했으나 영어라는 언어의 전리품을 얻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에너지가 넘쳐 보이는 인도여인이 주로 식탁의 화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그녀의 영어는 유창하다고는 하나 내 귀에는 강한 인도 식 억양으로 딱따구리 우는 새소리처럼 들렸다.

그녀는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후 큰 소리로 21세기 미국기업계의 신데렐라를 소개하고 싶다고 큰소리로 외친다. 인도 태생인 51세의 인드라 누이(Indra Nooyi)가 미국 펩시회사의 최초여성으로 최고경영자(CEO)에 오른 신화같은 이야기다. 그녀는 미국 기업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 10위에 뽑혔다고 한다. 그녀는 힐러리가 대선에서 성차별의 유리천정을 깨부수지 못했지만 인도태생 기업의 여왕이 성차별과 인종차별이라는 두꺼운 방탄유리 천정을 뚫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이름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단한 여자가 아닌가? 실로 꿰매지 않은 긴 천의 전통의상을 두른 인도여성이 글로벌 경제시장의 최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인도계 이민자인 그녀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수준 높은 영어 구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꿈이 비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영어실력이 모자라면 일터에서 경쟁력에서 떨어진다. 굶주림과 빈곤의 상징이었던 인도가 글로벌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인도인들은 금융계. IT 첨단기술 분야, 법조계 등 인맥의 그물망의 네트워크를 짜고 있다. 인도인들은 지구촌에 흩어져 살고 있어도 모국의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들은 공동 문화유산을 공유한 민족공동체의 띠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모든 전문분야에서 유창한 영어로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므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몇 년 전 조카내외가 미국에서 석사학위 과정을 밟았다. 그들은 도서관에서 리포트를 쓰며 밤을 새워 영어와 지겨운 싸움을 치렀다. 그들은 끝내 영어라는 암초에 부딪쳐 석사과정을 끝내지 못했고 영어에 대한 열등감도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이 귀국할 때는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얻은 두 아이만을 안고 돌아갔다. 그들은 한국에 돌아가 아이들의 영어공부를 가르치는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고 한다. 한국도 국제사회에 편승하기 위해 영어공부에 몰입하는 광풍이 불고 있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영어는 생존전략의 무기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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