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늙은 개

2008-12-05 (금)
크게 작게
쿠키는 우리 집 식구다. 검정과 고동색 털이 북실북실한데 큰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지저분하게 엉킨 털이 눈을 덮으니까 엎드려 있을 땐 어느 쪽이 앞인지 구별이 안 되고 무명실을 꼬아 만든 대걸레를 연상시킨다.

쿠키는 하루 종일 엎드려 잔다. 나는 식사를 대령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내가 가면 게으른 눈꺼풀만 억지로 들어 올려 힐끔 쳐다보고는 ‘헹! 별 볼일 없구먼!’ 하고 다시 잔다.

쿠키는 한국말을 알아듣는 모양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 “오늘은 쿠키 목욕 좀 시켜야겠네”라고 말하면 언제 들었는지 스르르 일어나 벽장 뒤쪽 구석에 숨어서 종일 안 나온다.


식구들이 샤워를 할 때는 따라 들어와서 새로 산 비누냄새나 과일향기 나는 샴푸냄새도 킁킁 맡아보지만 자기를 씻기려고 준비하는 것은 금세 눈치를 채고는 책상 밑에 숨는다.

나는 개가 늙어가는 것이 참 좋다. 늙어가는 개의 눈은 참 다정하다. 사람의 눈은 간혹 나이와 함께 탁하여지거나 교활하여지는데 늙은 개의 눈에는 용납과 인내가 들어 있다. 나처럼 못된 주인의 성격을 참고 살아낸 자의 지혜로움, 견디어냄이 들어 있다.

이름 난 사진작가, 마크 애셔의 ‘오랜 친구’라는 사진집에는 이처럼 잘 늙어간 개 사진 수 십 점이 실려 있다.

8세 된 독일산 셰퍼드, 험프리라는 개를 통해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고 아울러 개의 일생(그러면 견생인가?)도 그려보고 있다. 작가 애셔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늙은 개는 지혜와 인내가 가득하다. 요즘처럼 젊음이라는 단어에 강박증을 가지는 사회풍조는 참된 아름다움을 거스른다. TV나 잡지, 영화도 어린 개만 집중 조명한다. 이 사회는 중요한 가치를 잃어가고 있다.”

올 가을의 신간 ‘늙은 개가 최고’라는 사진 에세이집도 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느릿느릿 살아가는 아름다움,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늙은 개의 모습에 담겨 있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내 친구 하나는 죽기 전 일 년을 오래 키우던 늙은 개와 함께 보냈다.

13세 된 골든 리트리버였는데 워낙 늙어서 뒷다리에 관절염을 앓느라 앉고 일어설 때마다 신음을 냈지만 단 한순간도 주인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간호하던 가족이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는 물컵을 입으로 물어다가 부엌 정수기의 물을 눌러서 아픈 주인에게 전했고 환자가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면 밤이 새도록 성한 두 앞발로 환자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나중에 친구가 응급실로 실려가 병원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야 했을 때 그의 늙은 개는 환자가 누웠던 침상 곁에서 3일 밤낮을 먹지도 않고 기다리다가 친구가 숨을 거둔 이튿날 자기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도 늙은 개 한 마리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냈다. 동물병원에 입원시킨 개를 저녁마다 면회 갔는데 고통 중에도 개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를 안타까이 바라보았다. 안락사를 결정하던 날, 병든 늙은 개를 품에 안았는데 눈물을 참는 내게 개가 눈으로 말했다. ‘날 사랑해 준 것 고마워요. 난 정말 괜찮다오.’

순종. 늙은 개가 나에게 가르쳐주고 간 두 글자다.

김 범 수
(치과의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