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긴장의 띠

2008-12-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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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온도가 급강하하고 혹한이 몰아치니 옛날 김장 담그던 광경과 아궁이에 연탄 떼던 겨울철 풍경이 떠오른다. 그 추운 엄동설한 속에서도 주부들은 꽁꽁 얼어붙는 손으로 겨우내 먹을 김장을 담그곤 했다. 배추를 다듬어 소금물에 절였다가 다시 찬물에 헹구게 되면 너무 차서 뼈까지 시리게 하여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또 날씨가 추워지면 무엇보다 집안의 온도를 따뜻하게 데워줄 구공탄도 빼놓을 수가 없는 겨울철 대명사다. 나갔다 들어오면 아궁이에서 피어나는 연탄의 불길로 온돌방이 따뜻하게 데워져 바닥에 깔아놓은 이불 밑에 손과 발을 밀어 넣으면 그 보다 더 기가 막힌 따스함이 있을 수 없었다. 어쩌다 연탄불이 꺼져 방안이 싸늘하면 그 불을 다시 지피기에 얼마나 귀찮고 온 몸이 추웠던가.

불을 다시 살리느라 연탄위에 부채질을 하며 불을 붙이다보면 재가 눈과 얼굴을 뒤덮여 피부가 새카맣게 그을리고 눈이 매워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연탄불 때문에 잘 자다가도 어쩌다 한번 불이 꺼지면 이를 다시 살리느라 우리는 또 얼마나 귀찮고 고생스러운 시절을 보냈는가. 그래도 우리는 이를 잘 참아내며 이 속에서 참으로 푸근하고 편안함 속에서 삶의 행복을 느꼈었다. 가족 간에 오손 도손, 화목과 우애도 얼마나 깊었는가. 돌아보면 이 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다 된 난방장치로 집안 전체가 스위치만 켜면 금방 훈훈해지고, 김장도 공연히 얼음물에 고생하며 담굴 필요가 없어졌다. 집안에 더운 물도 철철 넘쳐나고 수퍼마켓에 가서 돈만 주면 이미 다 만들어진 김치를 사서 얼마든지 편하게 먹을 수 있다.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못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는 지금 편리한 생활, 따뜻한 생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때가 더 행복한가?


사람들은 모두 옛날보다 풍요롭게 살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부족한 예전이 더 행복했고, 가족 간의 관계도 그 때가 더 친밀했다고들 말한다. 행복은 많은 것 보다 없는 곳에서 더 나오는 것일까. 그래선지 사람들은 단칸방에 온 식구가 오밀조밀 살았던 옛날을 더 그리워하고 있다. 예전의 생활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사는 생활은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고 해도 너무나 고급이고 너무나 풍요한 생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대다수가 행복하지 않다고 투정하곤 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의 정신자세와 생활태도가 그만큼 느슨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 풍족하게 살고 있는 것은 1세들이 잡초처럼 단단한 땅을 뚫고 나오는 끈기와 생명력을 붙들고 살아온 노고와 땀,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경제 대국 세계 12위권에 든 것이나 이곳 한인사회가 본격적인 이민역사 30여년 만에 기적에 가까울 만한 경제성장을 보인 것은 다 1세들이 살면서 각고 끝에 얻은 귀한 결실이다. 갖은 시련과 우여곡절, 삶의 가파른 경쟁 속에서 얻은 땀의 결정체인 것이다. 행복이란 꼭 물질이 많은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 간에 의지하고 도와주고 격려하는 중에 싹트는 것이다. 최근 한인사회에는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 사는 광경이 자주 눈에 띠고 있다. 이들은 모두 오랜만에 오히려 더 가족 간에 정을 느끼고 새로운 행복을 맛보고 있다고들 말한다. 콩깍지 하나라도 서로 나누어 먹으면 정이 더 붙고, 없을 때가 오히려 가족 간에 더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없다고, 잘 안된다고 불행한 것이 아닌 것이다. 모든 것은 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옛날 보다 지금 생활이 훨씬 더 풍요로워졌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저 감사만 나올 뿐이다. 실제로 보릿고개 시절, 경제 환란 시절을 한국에서나 미국에서 다 겪어내지 않았는가. 어려울수록 더 고통스럽던 그 시절의 생활을 생각하며 지금의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피아노를 칠 때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면 피아노의 음 줄이 세게 잡아당긴다고 한다. 피아노의 아름다운 소리는 바로 이 잡아당기는 줄의 박력에 의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삶이 비록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럴 때 우리가 마치 피아노 소리가 긴장에 의해 아름다운 소리
를 내는 것처럼 우리도 알게 모르게 해이해진 마음과 정신을 다시 새롭게 가다듬어 현재 부딪친 불황의 늪에서 힘차게 헤어나는 그런 아름답고 활기찬 한인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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