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추가 김치를 넘어 묵은지로

2008-10-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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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석(뉴욕그리스도의 교회 목사)

밭에 배추씨를 뿌린 농부의 마음은 어서 키워서 김장김치 담궈 먹자라는 생각이 있다. 생각대로 씨앗은 땅을 뚫고 자라 싹을 내더니 이내 숙성하기 시작한다. 오래 전부터 터를 잡고 있는 잡초들을 향하여 밭이 왕자가 된 듯 주변을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다.

그리고 옆으로 점점 영역을 넓혀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자리를 잡아간다. 잘 자란 배추는 김치라는 새로운 옷을 입기 위해 씻기고 소금에 절임을 통과하여 색채 옷을 입는다. 같은 밭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배추는 국거리로, 어떤 배추는 상에 올라가는 김치로 탈바꿈한다.
배추가 소금에 푹 절이는 만큼 맛있는 배추가 된다고 한다. 김치가 된지 시간이 지나도 누가 인정해 주지 않고 그저 김장독 속에서 머무르는 김치는 또 다른 세계의 묵은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숙성 조건이 조금이라도 변하면 썩기도 하고 물러터져서 오물보다 더한 식품으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인생의 삶을 배추에게서 배운다. 젊은 시절 주변이 어찌되었든 내가 먼저 커야 하고 내가 먼저 먹어야 했다. 그리고 농부라는 보호자의 관리 가운데 스스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살았다. 예쁘고 통통하게 자랐으면 김치로 바뀌고, 주변에서 놀기만 했다면 국거리와 동물 사료로 급락하고 만다. 배추가 되어 살아가면서 배추의 색깔을 비롯하여 자기 확신, 자기 교만, 자기 경험, 자기 중심의 물을 뺄 때까지 소금에 폭삭! 절이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치를 먹으면서도 배추 맛을 말하지 않고 양념 맛만 말하고 만다. 지금까지 지켜온 자존심도 송두리째 벗어버리게 하고 몽땅 내려놓게 한다. 일찍 내려놓을수록 사람들은 김치 맛을 칭찬한다.김치와 찌개가 만나고 전과 만나고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아갈 때 묵은지로 선택된 김치들은 항아리에서 꼼짝도 못한다. 그처럼 환한 세상에서 세상이 다 내 것처럼 살았는데 캄캄한 구석에서 또 다른 주인의 때만 기다려야 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아야 한다. 색깔도 거무퇴퇴하다.

언뜻 보기에 누구 하나 젓가락질하여 먹을 맛도 주지 못한다. 그래도 묵은지는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고 또 내어놓을 때까지 죽은 듯 살아있어야 한다. 묵은지는 오래된 김장 김치라는 뜻으로 저온에서 6개월 이상 숙성 저장하여 따뜻한 계절에 김장김치의 맛을 느끼게 하는 별미 김치다. 묵은지의 효능은 항암효과, 항산화작용, 면역증진 효과, 순환기계 개선 효과 등 이미 세계보건기구에서 건강식품으로 인정한 영양식품이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제아무리 맛있는 양념을 넣어 조리한다고 해도 찜이나 찌개 맛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김치다. 인내의 시간을 잘 견딘 묵은지는 가장 늦게, 가장 많이 칭찬을 받으며 자리를 잡게 된다.

어떤 이는 더디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주인의 때와 쓰임을 바라고 인내할 줄 아는 묵은지의 기다림은 그저 자리만 지키고 시간만 가길 원하진 않는다. 썩고 물러터짐을 막기 위하여 부단히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선배들이 들려주는 귀한 말 한마디가 묵은지 같음을 알아 맛있는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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