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력적인 삶

2008-10-0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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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영화배우 폴 뉴먼이 며칠 전에 별세했다. 참으로 정력적인 인생을 산 사람이었다. 29세부터 죽기 3년 전인 80세까지 51년 동안 50편의 영화에 주연이나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연기에 평생을 쏟은 정력적인 삶이었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하는 것보다 자기의 길을 얼마나 정력적으로 달렸느냐 하는 것이 성공과 실패를 가리는 척도가 된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직업의 종류를 막론하고 존경스런 마음이 간다.

파블로 피카소는 혼자 외롭게 죽었다. 방문객에 의하여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후의 모습은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의 손에는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었고 침대에는 화구가 흩어져 있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간 것이다. 피카소가 만일 자기의 그림
을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작품들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파괴하는 생활을 살았다. 창조와 파괴, 그것은 문명 발달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개인생활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철학이다.


나는 ‘열심’이 성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게으르고도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성공이란 지나가다가 낚아채는 것이 아니고 열심이라고 불리는 계단을 하나씩 딛고 올라섰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다. 회사에서 출세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내가 열심히 일하든지 어리석은 사장을 만나든지 둘 중 한 가지만 갖추어지면 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점 하나가 있는데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별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말만 많이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행동하는 자에 의하여 밀려난다. 결국 세상은 열심 있는 자들이 승리하게 되어 있다. 종교도 열심을 내어 헌신하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습관적으로 신
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회의(懷疑)에 빠지거나 허탈해져서 낙오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열심을 내면 스스로 신이 나고 일이 잘 진척된다. 그러기에 개인이나 사회나 발전을 위해서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자세(전진적 자세)가 필수적이다. 몸을 뒤로 젖히고 빨리 달릴 수가 있겠는가? 초대 교회(기독교 초창기 교회)는 물질적 유산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적 유산은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진실했고 열정이 있었으며 이웃에게 사랑의 본이 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열심’을 뜻하는 영어 enthusiasm 은 그리스어 ‘en deos’에서 나왔다. ‘하나님 안에서’란 의미이다. 진리를 표준으로 사는 사람은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알사탕을 내가 어렸을 때는 눈깔사탕이라고 불렀다. 아주 단단한데도 아이들은 보드득보드득 이빨로 까먹었다. 그러나 미국에 와서 알사탕을 이빨로 까먹는 아이나 어른을 별로 보지 못했다. 무엇을 먹을 때 소리를 내지 않는 그들의 습관도 있지만 그 보다 알사탕 한 개를 천천히 녹여먹는 인내를 못 가진 우리들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꾸준하고 지긋한 사람은 어쩐지 매력이 흐르고 믿음직하다. 재간이 많아도 변화무쌍한 사람은 얄팍하게 보인다. 내가 아는 사람이 “딸이 마흔 두 살인데 지난 봄에 대학을 나왔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꾸준히 자신의 인생을 밀고 나가면 그 자체에 행복이 있고 그것이 성공이다.

나의 선배 한 분은 노래를 좋아해서 대학생 때 교회 성가대원이 되었다. 그 후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학장이 되고 총장이 된 후에도 여전히 성가대석에 앉아 있었다. 꾸준함이 인간을 얼마나 멋지게 만드는가!

너무 출발이 늦었다고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인생에는 1착(着)도 2착도 없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를 썼고, 빅토르 위고는 60세에 ‘레 미제라블’을 쓰기 시작했으며 도스토에프스키는 57세에 대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미완성교향악처럼 다 끝내지 못하고 중단되어도 좋다. 하는 데까지 하는 것이다. 꾸준히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것이 정력적인 삶이다. 그렇게 살아야 피곤하지도 않다.

고려 시대에는 정부의 정책 변화가 너무나 심하여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렇게 되면 나라 자체 뿐이 아니라 백성들도 불안해진다. 꾸준한 정력가가 있는 직장은 다행이다. 이런 사람을 가장(家長)으로 둔 집, 그런 사람들이 기둥이 된 교회는 희망이 있다. 삶의 종지부를 의식할 것 없다. 나의 순간순간에는 오직 쉼표만을 찍고 계속하여 인생의 다음 문장을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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