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더불어 산다는 것

2008-09-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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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휘(언론인)

사람이 살아가는데 서로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다 함께 어울리는 삶을 가리킨다. 함께 사는 것은 더불어 사는 것이요, ‘더불다’는 말은 서로가 도우며 산다는 뜻이다.한국인은 낙천적이며 다정다감하고 인정이 넘치는 민족이다. 그러면서도 치우치기 잘 하고 남과 더불어 어울리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좁은 땅에서 동서 지역분과를 비롯해 노사 간, 빈부 간, 남녀 간, 세대 간에 깊은 골이 가실 줄 모르고 학연, 지연, 혈연의 연줄을 통한 줄타기 현상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수년 전, LA에서 코리아타운이 흑인 폭도들의 공격 대상이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떠돌이 살이 하는 유목민은 낯선 지방에 가서 발 붙이고 살려면 그 곳 풍습을 알고 정보를 얻어야 하므로 그 곳 사람들과 사귀어 친숙해지는데 익숙하다. 농사를 생업으로 하던 우리 조상은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붙박이가 되어 씨 뿌리고 거두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다른 세상의 새로운 정보같은 것은 절실하지 않았다.


어쩌다 외지에서 낯선 사람이라도 오면 우리와는 다른 사람으로 쳐서 경계의 대상이었다. 우리 집, 우리 문중, 우리 동네, 우리 서당, 우리 성씨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외지 사람이요,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없는 상대로 여겼다. 이런 유전자의 대물림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에게 국제적 매커니즘을 익히는데 장애요인이되고 있다.동남아에서 온 외국 근로자들의 “우리도 인간입니다”라는 하소연은 이 땅에서 얼마나 배타적 서러움을 겪었기에 나온 말이겠는가.

중국의 어느 조선족은 “한국이 통일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통일이 되면 북한사람과 조선족을 노예 취급할 것이라는 게 그의 가시돋친 말의 숨은 뜻이다.이웃을 정으로 보살피며 따뜻하게 배려하는 것은 인간 공동체를 아우르는 생존법칙이다. 베푸는 것 없이 빼앗고 챙기기만 하는 사람은 종교나 도덕의 차원을 떠나 현실적 타산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처세법이다. 산업사회의 도시생활, 직장조직에서 ‘Give and Take’는 처세의 불문률이다. 계산 빠른 다기능 복합사회에서 나 홀로 이득을 가로채겠다는 것이 어찌 될 법한 일인가.

마음과 질병의 관계를 연구하는 하버드 의과대학의 스티브 로크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남을 이용하고 빼앗는 것만 생각하는 극히 이기적인 사람은 질병에 걸리기 쉬울 뿐 아니라 병에 걸리면 치료하기도 힘들다”빈대 낯짝같이 좁은 마음으로 내 것과 우리 것만 챙기면 많은 다른 사람, 다른 집단으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왕따 현상이 일어날 것은 뻔한 이치다. 좋던 싫던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세상은 하늘의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커뮤니티를 만들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세상은 고등수
학이 아닌 쉬운 산술적 등식으로 균형과 조화의 밸런스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우리의 ‘홍익인간’ 정신은 농경사회의 왜곡된 편협성과 광복 후의 혼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급작스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퇴색하고 말았다. 허나, 남을 해롭게 하면 자신의 양심이 괴롭고, 내 욕심만 부리면 미움의 대상이 된다는 현실 인식은 결국, 홍익(弘益)은 개아익(個我益)과 함수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가까운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한가? 날이 새면 전화 걸고, 경조사에 품앗이하며, 취미와 모임을 함께 하는 친구나 이웃이 있다는 것은 더없는 축복이다.

서로 정을 나누고 고락을 같이 하는 돈독한 친분관계, 삭막한 경쟁의 인생 행로에서 이런 길벗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한데도 우리 주변에는 축복받을 정분을 고마워할 줄 모르고 오히려 흉보고 헐뜯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그런 사이라면 차라리 만나지 않은 편이 낫지 않겠나 싶다.
허물은 감싸고 어려움은 도우며 아픔은 나누어 가지는 사이가 참다운 이웃이요, 그런 이웃이 모여 사는 곳이 진정 극락이고 낙원이 아니겠는가. 플라톤이 내세운 ‘이상국가’나 토마스 모어가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바로 이런 세상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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