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계문명의 덫

2008-09-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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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요사이 젊은 부부들이 아기를 임신하면 태아의 초음파 영상 촬영을 한다. 태아 성장을 단계별로 초음파 동영상을 촬영해 기념 비디오를 만든다.
태아 모습의 영상을 포착하여 기념 비디오나 사진을 찍어주는 업체들이 샤핑센터와 상가에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미완성의 태아들이 상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부부들은 태아의 초음파 영상을 웹사이트에 공개하기도 하고 휴대전화 배경화면으로 꾸미기도 한다. 이제 손가락, 발가락, 뇌, 심장과 동맥혈관도 생겼다고 태아 사진을 들여다 보며 신기해 한다. 어머니의 혈액과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자라고 있는 생명체의 경이롭고 신비한 진행과정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아이가 세상 밖으로 태어나는 순간 터뜨리는 울음소리는 심장이 파열할 것 같은 벅찬 기쁨을 준다. 왜 그 감동적인 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것일까?


며칠 전 정기 유방암 검진을 받았다. 눈부시게 투명하고 맑은 가을 오후였다. 그러나 대기실 안의 분위기는 무덤 속처럼 가라앉았다. 중년의 러시아계 백인 여인, 다갈색 피부의 히스패닉 여인,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금발의 백인, 동양계 여인들이 둘러앉아 있는데 모두 살이 찌고 몸집이 크다.
내 차례가 되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최신 첨단기계인 디지털 유방 촬영기의 화면으로 흑백으로 확대된 조직세포가 비친다.

검사가 끝난 후 짧은 과정이지만 어둡고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았다. 이 최신 기계는 신속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촬영과 동시에 정상이라는 결과도 즉시 판독할 수가 있었다.미국 임상 암학회(NASCO)에 발표된 연구자료에 의하면 동물성 지방 과다 섭취외 비만이 유방암 발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유방암이 인종을 넘어 급증하고 있는 것은 서구화된 음식과 생활습관, 늦은 결혼과 줄어드는 출산 횟수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이지 않는 것에도 있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수평관계를 갖고 있는 지구촌의 질병도 세계화되고 있는 것 같다.독신으로 살면서 한 번도 출산 경험이 없는 여성은 출산을 한 여성에 비해 유방암 발생률이 높다.유방암은 봉건시대에 살았던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식생활과 습관의 삶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질병이다. 그 분들은 일찍 결혼을 하고 여러 아이들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면서 모유를 아기에게 먹이며 키웠다. 유방암의 낮은 발생률은 저지방과 섬유질이 많은 식생활 습관이다.전 근대 시대의 여인들은 저지방의 콩과 두부와 섬유질이 많은 나물을 먹었다. 그리고 암의 예방은 규칙적인 운동과 즐겁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라고 한다.

온종일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온 몸을 던져 치열하게 살았으니 관절에 녹이 쓸 틈이 없었다. 옛날 여인들의 음식과 생활습관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삶이었다. 그러니 암세포의 독버섯이 신진대사가 활발한 생명력이 넘치는 세포 속에서 피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유방암은 여성 암 중 1위를 차지하며 생명을 빼앗아 가는 악성 종양이다. 30세 이후부터 자가검진과 35세 이상부터 정기검진을 받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러니 해마다 유방암 정기 검진을 받아야 한다. 갱년기가 지나면 뼈 밀도를 측정하는 골다공증 검진 촬영도 받아야 한다.현대 여자들은 봉건시대에 남존여비라는 힘의 논리로 여자들을 속박했던 족쇠에서 풀려났다. 집안일과 임신, 출산, 아이 기르는 일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풍요한 물질문명이 갖다준 여성들에게 족쇄가 다시 채워졌다.

어쨌든 인간이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따르지 않는 한 건강검진의 최첨단 기계도 함께 늘 공존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현대인들은 가벼운 접촉사고로 머리가 아파도 응급실로 달려가 CT나 MRI 촬영을 한다.
현대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몇 차례나 진단촬영을 받을까? TV, 컴퓨터 모니터, 전자레인지, 휴대폰, 전기스탠드 등에서 방출하는 전자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거미줄에 곤충이 걸리듯이 기계문명의 덫에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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