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구마와 감

2008-09-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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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미국 식품점에 가서 산 미국 고구마는 덜 익은 연붉은 색깔에 속살마저 물컹물컹한데 한국식품점에 가서 산 한국산 고구마는 물컹물컹하지도 않고 속이 단단할 뿐 아니라 속살이 하야스름하고 그 맛이 꼭 밤처럼 달다. 꼭 한국사람과 같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사람의 얼굴을 보고 Stone Face라고 하지만 한국사람은 점잖기가 공자님과 같아서 일단 사귀고 나서부터야 시간과 비례해서 시간이 갈수록 단맛을 더해진다. 처음에는 약간 떫다가 익을수록 단맛을 더해가는 감이나 고구마, 그게 한국사람이다. 고구마를 한국에다 소개한 사람의 그 혜안이 경이롭다.고구마는 1760여년 전, 이조 예조참의로 있던 조엄이란 사람이 통신사 임무를 띠고 일본으로 가던 중 대마도에서 일본사람들이 먹는 것을 보고 수입을 했다고 그가 쓴 ‘해사일기’에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가 고구마를 알게 된 내력을 약 250년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한국 중남부에 많이 퍼져있는 감 또한 처음에는 떫다가 익으면서 단맛을 더해간다. 잎새가 다 떨어진 늦가을, 잎새가 다 떨어져도 빈 가지에 매달려 슬슬 차가워지는 초겨울 바람 앞에서 더욱 색깔을 진하게 내보이며 익어가는 감, 어려울수록 큰 힘을 내면서 오천년을 지탱해 온 한국사람들의 끈질긴 내성과 같다.지금은 전문적으로 고구마나 감을 재배하는 농가가 생겨나 투박하게 생겼던 고구마도, 작았던 감도 옛 모습을 잃어가지만 전에는 남쪽 농가 어느 곳이든 집집마다 감나무 한 그루씩은 거의 외롭게 서 있었다. 감나무 등 껍질은 일을 많이 한 시골 농부의 굵게 터진 손등 같지만 늦가을 햇빛에 노란 광채를 휘날리며 가난한 시골집을 부자처럼 보여주는 감나무, 그것이 우리들이고 그것이 우리들의 위안이고 우리들의 폭넓은 정서다.

가난하다고 가난을 탓하고 살아온 사람은 없다. 견뎌낼 뿐이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거꾸로 간다. 먹고 사는데 아무런 걱정 없이 잘 살게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평이 많아진다. 알게 모르게 불평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란 처음에는 달다가 날이 가면 갈수록 떫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홍시처럼 달다가 날이 갈수록 떫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처방도 없고 약도 없는 현대의 약삭빠른 병이다.

정치하는 사람도, 변호사도, 의사도, 장사하는 사람도, 친구라는 사람도, 심지어는 가족 중에서도 내게 이득이 없으면 외면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약삭병’이 늘어간다. 손익의 사실만 예의 주시할 뿐 인간적 진실을 지니고 접근하려 하지 않는다. 명품처럼 잘 생기지 않았어도 고구마나 감을 보면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아도 그 소박한 진실에 정이 간다. 별로 갈 데도 없는 외인부락 이민수용소에서 남이 알아주기 바라는 건조한 심정 때문에 속 빈 사람들에게 팔리기도 잘 팔리는 명품들, 허세보다는 소박한 진실로 속을 꽉 채운 못난 고구마나 감이 나에게는 더없이 정이 간다.

땅에서 나서 양식이 되어주는 작물이 모두 둥글어서인지 모가 난 고구마나 감은 없다. 그저 둥글고 소탈할 뿐이다. 그걸 먹고 사는 사람의 마음도 소탈하고 둥글어야 할 터인데 날이 갈수록 마음마다 귀퉁이에 모가 생기고 마음에 날이 선다. 사치의 경쟁과 오만의 경쟁 때문이다. 잘 살
면 얼마나 잘 살고 못 살면 얼마나 못 사는가? 사람 대하기가 조심스럽다.
급행열차의 속도를 부러워하는 성공 열망의 외적 사실보다는 마음 속에서 걸어가는 차근차근한 진실은 언제나 답답한 서행이라 인간관계를 점령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점령하려는 계획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사람이라고 불려지지만 인간은 상대성으로서 혼자가 아닌 묶음의 간격에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남편으로서의 혼자는 사람일 뿐, 인간이 아니고 아내도 혼자로서는 사람일 뿐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란 적게는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위를 위하여 평화롭고 위안이
되는 좋은 일을 이룰 때 이 두 사람이 하나의 인간이 되고, 집단이 인간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수소와 산소가 적절한 비례로 합해졌을 때 물이 되는 것이지 수소나 산소가 혼자일 때에는 수소는 수소이고 산소는 산소일 뿐이다. 상대성의 관계를 적절하게 이룬 사람이 인간이요, 반쯤 이룬 사람은 절반쯤의 인간이 아니라 그대로 사람일 뿐이다.사람이 짐승이 하는 짓보다도 못할 때 “사람도 아니다” 하고 나무라는 것처럼 가정을 불행하게 만드는 자, 상대성 관계에서 이익만을 노리는 자, 사랑의 관계에서 희생을 모르는 자, 남을
무시하는 자, 갈 데도 별로 없는데 명품을 들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자, 아무도 모르는 과거를 부풀려 자랑하려 하는 자, 사기치는 자, 거짓으로 내복을 지어입은 자, 허세로 정장을 차려입은 자, 정치꾼, 탐하는 자, 그리고 놀음꾼… 고구마는 그저 소박한 것이 진실일 뿐이고, 감은 그저 시간이 갈수록 달아지는 것이 진실일 뿐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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