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 하루살이

2008-07-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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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 되면 생각나는 곤충이 ‘하루살이’다.

성경에 자주 인용되는 말 하나 역시 하루살이다. 하루살이는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의 상징으로 구약과 신약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하루살이 곤충이 정말 단 하루를 살고 생을 마치는지 나는 확실히 모른다. 다만 그들의 수명이 짧다는 것만은 짐작으로 알 수 있다.

학창시절 밤늦게까지 공부하느라고 마루에 나와 전등불을 켜놓고 앉아 있으면 하루살이들이 머리 위로 수도 없이 날아다녔다. 이따금씩 뜨거운 전구 가까이 잘못 간 나머지 타 죽거나 쇼크를 받고 책 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하루살이는 어미가 물 속에 알을 낳으면 한 달 안에 깨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1~2년을 물 속에서 살다가 성충으로 자라 날개를 달고 땅 위로 날아오른단다. 이 성충이 바로 ‘하루살이’인데 보통 하루에서 3일 정도 살지만 길게는 2주일 넘게 사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 유럽 등 전세계적으로 대략 2,000종 이상이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고 하니 놀랍다.

겨우 며칠 밖에 살지 못할 그들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나름대로의 ‘존재 의미’를 지닌다. 하루살이도 분명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기에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인간 쪽에서 보면 하루살이쯤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별 볼 일 없는 미물이겠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없으면 먹이사슬의 순환고리가 망가진다. 이는 인간의 눈에는 잘 뜨이지 않지만, 하루살이를 먹고사는 곤충이나 새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마치 소나 닭이 인간에게 필요하듯 말이다. 모든 존재는 이같이 저마다 필요성이 있다. 심지어 사냥꾼이 사슴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을 너무 잡아 죽이면, 결국 번식력이 강한 사슴의 수가 많아져 숲 속의 풀을 너무 먹어치우기 때문에 숲과 자연공원들이 망가진다고 하니, 모든 존재는 균형을 이루기 위한 필요불가결의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에게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건성으로 생각 없이 살다보면 중요한 것마저도 하찮게 보이니 말이다. 벌에 쏘이면 아픈 것만 생각하지, 어디 매일 수시로 먹고사는 과일에까지 생각이 미치느냐 말이다. 하루살이만 해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예부터 빈둥빈둥 놀면서 밥만 축내고 있는 게으른 사람을 나무라고 가르칠 때 ‘하루살이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말로써 나무랄 때가 많지 않던가.

구약 이사야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머리를 숙여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헤어져 주민조차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리라.” 이처럼 성경에서 하루살이는 덧없이 지나가는 짧은 인생과 인생무상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제 아무리 인공위성으로 달나라를 찾아가고 인터넷을 두드려 별의별 정보를 얻어내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자세히 따져보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한계다. 지금까지 그 누가 자기 자신의 죽을 날이 언제일지 알고 산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내일 죽게 될 운명을 모르고 사는 하루살이나 우리나 그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정녕 그렇다면, 그들 ‘하루살이’의 존재 의미 안에서 우리 인간도 어떻게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지 어느 정도 해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김 재 동
<가톨릭 종신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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