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교하는 삶-다람쥐 작전

2008-07-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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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뒷마당에는 과일 나무가 몇 그루 있다. 커다란 나무에 노란색, 보라색 꽃이 피는 것도 신기하지만 철 따라 과실이 맺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내가 뭘 했다고….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면 다람쥐가 찾아온다. 그림책에서 보던 다람쥐들을 가까이서 보니까 더욱 귀엽다. 또릿한 눈동자, 탐스러운 꼬랑지, 오물오물 씹는 모습이 쓰다듬고 싶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지금은 나의 원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괴물이 되었지만.
나의 정원에서 가장 먼저 열매를 맺는 것은 복숭아 나무다. 흰 복숭아와 노란 복숭아 두 종류를 심었는데 봄기운이 올라오면서 곧바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노래대로 활짝 분홍 꽃을 피운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어느덧 꽃이 지면서 초록색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가지가 찢어질 듯 수백 개의 열매가 다투어 하룻밤 사이에도 토실하게 영글어간다. 지친 몸으로 퇴근을 했다가도 뒷마당에 영글어가는 복숭아 열매를 보며 ‘하나님도 참!’ 하고 탄성을 지른다.
이때가 바로 나의 새로운 원수, 다람쥐 활약 기간이다. 나쁜 녀석 같으니라고! 다람쥐가 훑고 간 가지는 어제까지 탐스럽던 열매가 전멸이고 주변 땅위로 갉아먹은 씨앗만 수북하다. 처음엔 우리 집 식구인 털북숭이 쿠키가 다람쥐를 위협해서 좀 쫓아주려나 기대를 했는데 웬걸? 순둥이 쿠키는 다람쥐만 보면 무서워서 꽁지를 내리고 자기 집에 숨었다가 나중에 어슬렁 어슬렁 기어 나와서 떨어진 열매를 주워 먹는다.
페스트 컨트롤 회사에 연락을 했더니 커더런 덫을 놓아야 한다는데 그건 또 내가 무섭다. 그러다가 산 채 잡히면 어떡하라고? 과일나무를 유독 좋아하는 가드너 아저씨가 나무 밑둥을 둥그렇게 감싸는 양철판을 대주었다. 다람쥐가 올라가다가 미끄러지는 수법이다. 그 다음부터 영리한 다람쥐는 담장에서 점프를 하여 나무에 맘대로 올라갔다. 이번엔 그물을 사다가 몇 개 안남은 열매를 가지째로 일일이 감쌌다. 그물스타킹이다. 다음날 나가보니 다람쥐가 그물을 찢고 나머지 복숭아를 다 따먹었다. 이런 천하에 몹쓸 녀석들!
아아, 분하도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던 그 저녁, 나는 퇴근해 들어온 길을 되짚어 다시 내 오피스로 달려갔다. 약품보관 캐비닛을 열어 일종의 마취용 약품과 주사 바늘을 들고 집으로 달려온 나는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정의의 군사처럼 뒷마당으로 나갔다. 너희들은 이제 끝장이다! 내가 봐둔 마지막 한 개의 열매에 마취약을 주입하리라. 흐흐흐. 이때 마침 담장을 뛰어넘던 다람쥐 두 마리가 나랑 눈이 마주쳤는데 놀란 것은 오히려 내 쪽. 다람쥐가 주사 바늘을 든 채 놀라 멈춰선 내 몰골을 보더니 흥! 하면서 이번엔 새로 열매를 맺기 시작한 대추나무로 유유히 건너가는 것이 아닌가!
조그만 다람쥐가 커다란 나를 놀린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나를 화나게 한 것은 정말 분노해야할 커다란 사회 불의가 아니라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뿐이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

김 범 수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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