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눔의 행복- 사모곡

2008-05-0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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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는 올해로 77세이시고, 한국에 살고 계십니다. 재작년부터 치매가 와서, 그 명민하시던 판단력이 다 흐려지셨습니다. 가끔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여지없이 어머니이십니다. “거기 몇 시냐? 새벽 3시? 미안하다. 잠을 깨웠구나.” 그러시곤 전화를 끊으십니다. 어떤 때는 한 20분 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똑같은 얘기가 반복됩니다. 그런 날이면 잠을 더 이상 이룰 수가 없어 새벽을 하얗게 밝히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 죄송한 마음 등이 얽혀 가슴이 아립니다.

지난 3월, 인도네시아 비전 트립을 다녀오는 길에 2박3일의 짧은 시간 부모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치매약을 드셔서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아들이 왔다고 주섬주섬 일어나시는 모습에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이 왔다고 반가워하시면서 “일은 잘 하냐?, 어디 사냐?, 애는 몇이냐?, 몇 학년이냐?, 어디서 오는 길이냐?” 등의 질문을 쏟아내셨습니다. 대답해 드려도, 잠시 후 똑같은 질문을 또 하시고, 또 대답하면, 잠시 후 또 물어보시고…. 안타깝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인내심을 갖고 반복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점심으로 삼계탕을 배달시켜 놓고는 어린 시절 하던 식으로 “엄마가 기도해 주라”하며 응석을 부렸습니다. 설마 기도를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순간, 어머님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힘차고 유창한 기도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한 식사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잘 다듬어진 기도였습니다. 한두 해 하신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도엔 여태껏 물어보신 질문의 답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의 인생 전체를 다 꿰고 있었습니다. 기도 후 “엄마는 지금도 새벽마다 자식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 저는 다시 몽롱해지신 어머니를 끌어안고 참았던 울음을 쏟아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님이 알고 있는 최선의 자식 사랑 방법이고, 치매조차도 그 사랑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결코 자상한 어머니는 아니셨습니다. 아니 여장부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평생 목사이신 아버지를 보좌하는 사모의 삶을 1남2녀를 둔 어머니의 삶보다 우선순위에 두셨던 분이셨습니다. 천성적으로는 적극적이고 직선적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헌신과 성실을 모토로, 교회 일을 자식들의 학교 일보다 중요시하셨던 분이셨습니다. 온종일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시고, 어려운 가정이 있으면 지갑을 다 털어주고는 차비가 없어 십리 이상을 걸어 귀가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관절의 연골이 다 닳아 인공 연골을 삽입하시고도 그 일을 멈추지 못하셨던 분입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텅 빈 집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휴일에는 친구들이 부모의 손을 잡고 창경원, 경복궁으로 놀러가는 것을 보면서 여지없이 교회일로 집에 없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 모두, 목사 아들에게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고, 감히 불만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포기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불만은 사라졌지만, 가슴 한 구석에 오래 외로움이라는 심리적 외상이 남았습니다.

세월이 아주 오래 흐른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 어머니는 언제나 제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 마음에는 항상 자식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셨던 것입니다. 그걸 저는 몰랐던 것입니다. 곧 어버이날이 다가옵니다. 때늦은 이제야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귀에 들립니다. 어머니의 가슴이 느껴집니다. 아마 찾아뵙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전화는 드릴게요.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어머니 사랑합니다.

박 준 서
(월드비전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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