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 일상, 깨달음- “아바이! 아바이…”

2008-03-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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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초여름, 고아들을 돕는 일 때문에 북한에 들어가 한 고아원을 둘러보고 나올 때였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어린 아기의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바이! 아바이! 아바이!”
너무나 숨가쁘게, 그리고 온 힘을 다해서, 아바이를 부르는 소리에 일행들은 멈추어서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 고아원의 마루에 나와 있는 아기 하나가 울타리처럼 된 마루 난간을 붙잡고 우리 일행을 바라보며 아바이를 다급하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 일행 중에 자기 아빠가 있기나 한 것처럼 아바이를 불렀기 때문에 저는 순간적으로 우리를 배웅하는 그 고아원의 직원 중에 한 사람이 그 아이의 아빠려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같이 나오던 나이 지긋한 원장 선생이 저 아이는 아무나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자기 아빠인 줄 알고 저렇게 부른다고 귀찮은 듯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고아원은 젖먹이부터 세 살 이하의 아기들 300여명 정도를 보육하고 있었습니다. 젖먹이들은 대개 방안에서 보모들의 돌봄을 받고 있었지만 걸음을 걸을 수 있는 아기들은 햇볕 바른 뒷마루에 나와서 바깥 바람을 쏘이며 놀고 있었습니다. 아기들 곁에서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아주머니 보모 한 분이 그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입고 있는 옷이나, 아기들의 영양 상태나, 수용 환경에 관해 설명하지 않더라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아기들의 형편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에서도 고아들의 환경은 대개 열악한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경제 사정이 어려운 북한의 고아들이 있는 환경은 어떠하겠습니까.
제가 원장의 설명을 듣고 다시 뒤돌아보았더니 그 아기가 부르는 대상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였습니다. 아마 그 아기가 보기에 고아원을 찾아온 한 낯선 남자가 자기 아버지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서나, 어쩌면 자기 아빠라는 확신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가족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가지는 최후, 최소의 요람입니다. 가족이 있음으로써 사람은 사람다운 삶을 계획하고, 생활을 영위하고, 인간됨의 온기를 누리고, 또 정서적인 안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가족이 해체된 사람은 생활의 가장 위험하고 쓸쓸한 벼랑 끝에 서게 됩니다. 삶의 의욕이 상실되고, 그 일상은 규범을 벗어나 궤도 없는 생활로 떨어지는 위험에 직면합니다. 무엇보다 뼈를 깎는 고독감과 그리움에 허덕일 것입니다.
저는 아바이를 찾는 그 고아의 절규 속에서 가족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인간 본능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지 참 난감하였고, 가슴 쓰렸습니다. 고백하지만 저는 그 때 자동차 문을 열고 기다리는 기사와 곁에 서 있는 지도원을 포함한 원장과 일행들을 의식한 나머지 그 아이에게로 돌아가 손 한번 잡아주지도 못한 채 떠나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하면 마치 내 아이를 그곳에 두고 온 것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죄책감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후에 다시 그 고아원에 갔을 때, 그 아이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지만 보모들과 원장은 난처한 기색만 드러낼 뿐, 누군지 모르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거기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나를 부르던 그 아기였으리라고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중국 선양에 와 있습니다. 중국 정부의 곡물 수출 억제 때문에 고아들을 위한 우유와 밀가루 지원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에 현장으로 달려와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하고 북한고아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다짐합니다. 바로, 우리 모두가 그 아기들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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