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감자와 나눈 편지

2008-02-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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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한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한국인 김모씨와 나는 5년 전에 알게 되었다.
30대의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가 무기 징역을 선고 받은 뒤에 가정은 깨어졌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나는 그를 만나보지는 못하고 수년에 걸쳐 서로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그는 살인죄로 10년째 복역 중이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얼마 안 있어 한국의 연로한 어머님이 간신히 여비를 마련하여 미국에 오셨다가 단 하루 면회를 하고는 눈물 흘리며 한국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중범죄를 저질렀지만 김씨가 실은 얼마나 착하고 여린 사람인지 나는 내게 보내준 편지를 읽을 때마다 구구절절 느낄 수 있었다.
그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COR이라는 선교단체를 통해서였다. COR은 김운년 목사님과 김신화 사모님 두 분이 미국 각 지역의 한인 수감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기관이다. 김 목사님 가정은 13년 전 한 장기 복역수의 아들을 보살피다가 이 일에 소명을 받고 사역을 시작하셨다.
가족이 없는 수감자를 후원하고 그들에게 법적 도움을 주며 한국으로 이송되거나 출감하면서 한국으로 추방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일들을 맡아 하신다. 한 달이면 스무 날 이상을 미국 각 지역 교도소에 수감 중인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면회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나는 김씨와 편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 지내는 일상을 자세히 적어서 보내왔다. 모범수여서 일도 할 수 있었는데 공장에서 일하면서 버는 하루 1달러 정도의 돈은 언젠가 아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서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한번은 비가 많은 겨울이 지나고 캘리포니아에 봄이 왔을 때 그가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요즈음 저는 가족들과 집에서 단란하게 살던 시절을 자주 떠올립니다. 그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지요. 유치원 다니던 아들과 함께 소파에서 뒹굴던 생각이 납니다. 또 아들이 좋아하던 강아지 미키랑 공원에 놀러갔던 일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들과 함께 단 하루만이라도 이렇게 따뜻한 봄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중략)…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김치 통조림, 라면, 양말, 편지지, 우표, 비프 저키, 커피, 초컬릿….”
그의 편지에는 1년에 네 번 밖에는 받을 수 없는 나의 작은 소포를 열어서 다른 한국인 수감자 형과 아주 아주 조금씩 아껴서 나눠 먹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는 지난 봄, 그렇게도 누려보고 싶어 하던 햇살 따사한 어느 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던 아들이 양부모와 함께 면회를 왔다갔는데 자기보다 키가 더 커졌더라고 기뻐하던 내용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혼자 먼 길을 가고 말았다.
나는 지난 5년간 그를 면회 가지 않았던 나 자신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면회 창구 사이로 난 작은 공간을 통해 손이라도 만져볼 수 있을 때 만져보지 못한 나 자신의 게으름과 교만을 그의 죽음 앞에 무릎 꿇어 사과하고 싶다.

김 범 수(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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