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난의 냄새

2008-02-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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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30~40대 이상 연령대에 속한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가난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면서 성장해 왔을 것이다. 지저분한 뒷골목, 머리에 이가 우글우글한 아이들, 쥐꼬리 모아오기 운동, 형편없는 위생시설의 노점상, 가물에 콩 나기 정도로 보기 힘들었던 수세식 화장실, 흑백 TV라도 있는 집 앞에 매일 저녁마다 연속극을 보기 위해 모여드는 온 동네 어른들….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그 시절에는 “식사는 하셨습니까?”라는 말이 일종의 안부 인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방글라데시나 아프리카 대륙의 후진국가로 단기 선교를 나가게 되면 하는 처음 나오는 탄성이 “아! 꼭 옛날의 한국 모습 같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단기간에 엄청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는 소위 경제적인 선진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1970~8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곡선은 기독교의 성장곡선과 정비례했다. 영적으로 엄청난 축복을 받으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축복의 물꼬가 함께 터졌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난함과 풍요를 한 세대에서 동시에 경험한 아주 독특한 인종(?)이다. 일반적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본인이 개인적으로 자수성가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냥 그렇게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주어진 운명인데, 한국 사람들은 나라 전체가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불과 한 세대 사이에 아주 극적인 전환을 이룬 독특한 국민이 된 것이다.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컴패션(Compassion·‘긍휼’이라는 뜻)이라는 선교단체는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후원하기 위해 50여년 전 세워진 비영리 단체다. 에버렛 스완슨 선교사가 한국전쟁 기간에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한국 고아들을 돕기 위해 시작한 선교단체가 지난 반세기의 세월을 지나면서 이제는 전 세계 24개국에서 100여만명의 가난한 아동들을 돕는 대형 선교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한국은 지난 5년 전부터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미국 컴패션과 함께 가난한 나라 아이들을 함께 돕는 국가(Partner Country)가 됐다.
나는 얼마 전부터 이곳 컴패션의 일을 도우면서 가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날라오는 아이들의 편지와 사진을 보면서 지난날 내가 경험했던 가난의 냄새가 따듯한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기억 속에 되살아났다. 지저분한 골목을 배경 삼아 코흘리개 꼬마가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30여년 전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비록 오늘날 나는 이렇게 풍족한 환경가운데 축복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사실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전혀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컴패션의 디렉터 한 사람이 “한국인 후원자들이 최근 들어 아주 많이 늘고 있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물어왔다.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는 얼떨결에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가난과 풍요를 모두 알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가난은 인간 욕심의 부산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에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물질과 식량을 허락해 주셨지만 분배의 불균형이 문제다. 미국에서 쓰레기통으로 버려지는 음식물을 다 모으면 전 세계에 굶어죽는 아이들이 단 한명도 없게 할 수 있다. 미국과 한국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나눠줘야 한다. 그것이 지금 누리고 있는 복을 계속 연장할 수 있는 하늘나라의 비밀이기도 하다.

백 승 환(목사·예찬출판기획)
baekstephen@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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