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안경잡이의 고민

2006-05-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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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교에 가면서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이걸 끼면 앞으로 눈이 좋아질 수도 있나요? 당시 치맛바람 좀 날리시던 나의 어머니는 안과 의사의 처방을 받고는 이렇게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나의 안경 도수는 점점 높아졌고 잠 잘 때와 세수할 때만 빼고는 평생을 내 코 위에 안경이 올라앉아 있다.
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에 가면 아는 얼굴을 여럿 만나는데 그들도 대부분 안경잡이다. 서로 안경을 벗어놓고 샤워를 하다가 먼저 끝난 사람이 아이쿠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해오면 비누로 쓰라린 눈을 참아가며 허겁지겁 옆에 걸어둔 안경을 찾아 쓰기 바쁘다. 아아 녜녜…… 옆에 계셨는데 몰랐군요, 안녕하십니까?
날더러 거만해졌더라고 말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잠시 안경을 벗었을 때, 수영장이나 사우나에서 인사하기를 기대했다가 돌아선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 같은 안경잡이들은 생전 거만을 떨어보지도 못하고 오해만 받는다.
얼마 전에 친구 하나가 라식 수술을 받았다. 점점 안경알이 두꺼워지나 했더니 어느 날 수술을 받았다고 좋아했다. 얼마나 잘 보이는지 알아? 세상이 이렇게 확!실!히! 잘 보이는지 몰랐지. 나는 그 친구의 안경 벗은 얼굴을 처음 보았으므로 약간 낯선 느낌으로 마주보았는데 다른 부위에 비하여 눈 주변만 덜 그을린 듯 살결이 희었고 눈의 크기는 내가 알았던 사이즈보다 조금 작아진 것 같았다. “그 무거운 안경을 쓰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아깝다, 아까워…” 하고 친구는 말했다. 비밀인데 나는 겁이 나서 그런 수술 받을 생각을 못한다.
치과에서는 하루 종일 피를 보니까 안경이 나의 눈 프로텍터(보호대)가 되기도 한다. 환자의 입 속에서 피가 튈 때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교지에 나가서 치료할 때는 내가 안경잡이인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일부러라도 플래스틱 눈막이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선글래스에도 물론 도수가 들어있다. 운전 중에 선글라스를 썼다가 주차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 깜박 잊고 일반 안경으로 바꿔 끼지 않으면 나는 한 동안 시간을 착각한다. 어두운 주변을 둘러보며 음음… 요즘은 제법 빨리 어두워지는 걸? 하고 생각한다. 일반 안경을 차 안에 두고 왔으니 실내에서도 하는 수 없이 계속 선글라스를 쓴다. 그나마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실내에서 선글래스 쓰는 것을 건방지다 생각하므로 나는 또 오해를 받는다.
수영할 때 쓰는 나의 물안경에도 도수가 들어 있다. 아무 데서나 안 파니까 한 번 잃어버리면 낭패다. 한동안 일반 물안경을 쓰고 수영을 했는데 다른 때보다 훨씬 숨이 차서 웬일일까 했더니 시야가 뿌옇게 어두웠던 탓이다. 새 물안경을 샀더니 물속에 있는 타일 금 간 것까지 잘 보인다.
신혼 무렵, 안경을 쓰지 않는 와이프가 심각하게 말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제발 ‘몇 시야?’ 하고 묻는 대신 무언가 정다운 인사로 하루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튿날, 잠이 깨는 것과 동시에 나는 말했다. “여보, 굿 모닝! 근데 지금 몇 시야?”
어렸을 때 본 영화 속에서 오드리 헵번이 물었다. “어른이 되면 코가 부딪혀서 키스를 어떻게 하지요?” 나는 그 나이 때 코 대신 안경 걱정을 했다. ‘안경이 부딪혀서 어떻게 키스를 하나?’ 혹시 같은 고민에 빠진 안경잡이가 있다면… 일단 한번 실전에 임해보시라! 안경잡이에게도 인생은 공평하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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