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6세기, 종교 개혁

2006-05-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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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과연 개혁될 수 있는 대상인가? 16세기를 주름잡았던 종교개혁의 바람이 과연 가톨릭의 부조리한 제도를 변화시켰는가? 종교개혁에 의해 탄생된 개신교가 오늘날 또 다른 종교개혁에 당면하고 있다면 개혁의 끝은 어디인가?
가톨릭의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또 다른 분열이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1054년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로 대 분열된 후 16세기 들어 개신교(Protestant)라는 새 분파가 생겨난 셈이다.
완전히 썩어진 토양은 새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 16세기 기독교는 외형상으로 이제 더 이상 타락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성직 매매, 성직자의 타락, 그리고 종교세를 위시한 교회의 금전적 착취가 날로 심해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사원(오늘날 바티칸 교황청)의 건축자금을 만들기 위해 면죄부(Indulgence)판매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교황의 도장이 찍힌 죄 사함의 증표를 가지고 있으면 어떤 죄를 범했어도 모두 사해지고,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들의 죄도 사면 받아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당으로 옮겨진다는 면죄부 발상은 언뜻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면죄부를 구입해 사후 천국을 보장받기 원했고, 가난한 여자들은 몸을 팔아서라도 면죄부를 사기 원했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마틴 루터는 돈으로 천국을 살 수 있다는 허망한 믿음을 팔고 있는 교황에 대해 울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를 각오하고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의 잘못된 점을 비난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걸고 교황의 권위에 정면 도전을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물론 마틴 루터에 의해 불이 당겨졌지만 그것은 이미 시대적인 요청이었다. 루터보다 한 세기 앞서 영국의 존 위클리프, 체코의 개혁가 얀 후스와 같은 선구자들이 이미 가톨릭의 부패에 저항하며 종교개혁의 길을 열어놓았고, 인본주의를 강조한 르네상스의 물결은 제도와 전통을 앞세운 교회의 억압에 더 이상 눌려 있을 수 없게 했다.
루터는 1521년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조치를 당한 후 한적한 시골에 숨어 지내며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사실 루터가 달성한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은 말씀의 보급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결국 믿는 사람들의 마음의 개혁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를 개혁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후 구교와 신교로 나눠져 서로를 절대 용납하지 못하며 피의 대학살, 30년 종교 전쟁의 분쟁으로 치달으며 또 다른 양상의 문제를 야기했다. 면죄부 판매는 중단되었어도 예수의 사랑과 희생, 용서가 드러나는 진정한 교회 개혁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 오늘날 교회는 어떤 개혁에 당면하고 있는가? 혹시 아직도 면죄부를 팔고 있는 교회는 없는가? 하나님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뿐이라는 루터의 신앙 고백이 다시 한번 귓전을 맴돈다.


■16세기의 주요 사건일지
▶ 1517 루터 95개조항 반박문
▶ 1521 루터, 독일어로 성경번역
▶ 1522 틴들, 영어로 성경번역
▶ 1524 농민 반란
▶ 1545 트렌트 종교회의
▶ 1555 아우그스부르그 종교회의
▶ 1594 마테오 리치 “천주실의”
▶ 1598 낭트 칙령

/baekstephen@yahoo.com
백 승 환 목사
<예찬 출판기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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