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페라로, 전시회로 ‘살맛나는 16시간’

2006-03-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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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로, 전시회로 ‘살맛나는 16시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감상하기 위해 샌디에고로 달려간 음악을 사랑하는 모임 보헤미안스. 샌디에고 유명관광지 델 코로나도 호텔도 돌아봤다.

한인 음악동호인 클럽
‘보헤미안스’나들이

지난 18일 오전 8시45분. 월셔와 뮤어필드가 만나는 행콕팍의 한 길목, 정차된 버스 위로 사람들이 연이어 오른다. 주말의 시작 날씨가 짓궂지만 토요일 아침을 서두른 사람들의 표정이 가벼워 보인다. 외투에 묻은 빗방울을 털면서 서로 반가운 기색이다. 버스가 빗속을 뚫고 남쪽으로 달린다. 목적지는 샌디에고 시빅 디어터. 토요일 저녁 8시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도니제티) 공연을 보기 위함이다. 이름하여 ‘보헤미안스’(Bohemians).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LA와 가든그로브에서 모두 53명이 떠난 이들의 주말 오페라 나들이에 기자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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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차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들으니깐 참 좋네요~.” “운전 안하고 버스에 타고 있으니 이렇게 편하구만….”
오랜만의 여행인지 다들 하는 한마디에 버스 안이 시끄럽다. 나이도, 성별도, 사는 곳도 제각각이지만 음악을 좋아한다는 확실한 공통점이 하나의 끈이 되어 이들을 묶고 있다.
나눠준 과자와 과일 등을 먹으며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소풍의 기억이 절로 난다.
3시간을 달린 버스가 처음 정차한 곳은 샌디에고의 발보아팍(1549 El Prado, Suite #1). 샌디에고 미술관(San Diego Museum of Arts), 자연사박물관, 과학관, 사진전문 전시관 등 30여 개의 박물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길이며 건물들도 아름답게 꾸며놓아 잘 알려진 관광지이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도시락을 나눠준다. 한식 도시락에 밥과 국까지 푸짐하다. 다행히 날씨도 화창하다. 우중충했던 LA의 날씨는 간데 없고 비온 뒤 화창하고 맑은 하늘이 상쾌하다. 널따란 공원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는 맛이 그만이다.
식사 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3시15분까지 2시간 남짓 발보아팍을 둘러볼 수 있다. 마침 샌디에고 미술관 창립 80주년 전시회가 한창이다. ‘In Stabiano’를 주제로 2000여년 전 폭발한 베수비오산 주변 도시들의 유물들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과 문화·예술을 살펴보는 기획전이다. 취향에 따라 과학관이나 자연사박물관, 또는 길거리의 다양한 문화공연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다시 버스에 오르자 오늘 관람할 오페라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오페라 매니아인 보헤미안 클럽 이주헌 회장이 과거 샌디에고에서 봤던 오페라들의 기억과 관람할 ‘루치아’의 줄거리·등장인물 등을 재미있게 소개한다.
루치아 DVD도 준비되어 유명한 아리아들을 미리 감상하는 시간도 갖는다. ‘아는 만큼 들리는’ 법, 이런 사전공부 덕에 든든하기만 하다.
목적지인 샌디에고 다운타운에 내렸다. 공연감상에 앞서 미리 예약된 식당으로 향한다. 같이 온 한 테이블에 6∼7명씩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이날 참석한 53명 중 약 20명이 보헤미안의 멤버. 단체로 온 합창단, 함께 온 다정한 모녀·부부, 동창생들 등 나머지는 알음알음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식탁의 화제는 풍성하다.
샌디에고 시빅 디어터(1100 3rd Ave.)는 식당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순서를 기다려 각자 자리를 찾는다. 가방에서 오페라 망원경을 꺼내고 받은 브로셔를 확인하는 모습이 전문가 못지 않다.
라메르무어의 루치아는 17세기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루치아(Lucia)는 오빠이자 성주 엔리코(Enrico)의 원수 에드가르도(Edgardo)와 사랑에 빠진다.
오빠 엔리코는 루치아를 다른 왕과 정략결혼 시킴으로써 망해가는 가문을 살리려 한다. 에드가르도의 편지를 위조하는 등 오빠에게 속아 다른 왕과 결혼한 루치아는 결국 이성을 잃고 그 왕을 죽인 후 자살한다. 루치아를 사랑했던 에드가르도 마저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여러 명이 그것도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는 오페라라 감흥이 남다르다. 루치아의 사랑과 절망이 절정에 이를 즈음, 객석 이곳저곳에서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다. 수건이며 휴지를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오페라를 마친 후 버스에 오르면서 평이 한창이다. “테너가 참 잘하더라.” “소프라노가 좀 약했지?” “자리가 좀 더 앞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오페라 시작 직전에 앞으로 가면 가끔 빈 자리가 있는데. 난 앞에 가서 좋은 자리에서 봤어~.”
모두 잠든 버스가 가든그로브를 거쳐 LA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1시. 16시간에 가까운 문화 나들이의 끝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눈다.
박물관에서 오페라까지 풍성한 하루였지만 예상밖으로 비용은 많이 들지 않았다. 저녁을 제외한 모든 비용(점심, 오페라 티켓, 버스 대절료 등)이 개인에 100달러. 100달러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주말하루의 행복이었던 셈이다.
이날 어머니 노태완씨와 함께 여행에 동참한 데보라 이(가디나 거주)씨는 “어머니가 평소 음악을 좋아하셔서 음악회에 자주 다닌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샌디에고까지 와서 보기 힘든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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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 샌디에고 발보아 공원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피크닉을 하고 있는 보헤미안 클럽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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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중간에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노태완씨(왼쪽)와 데보라 리 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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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 클럽은?

이날 샌디에고 오페라 나들이를 조직한 한인 클래시컬 음악동호인 모임‘보헤미안 클럽’은 음악과 예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친목단체. 올해 16년째로 매달 한번씩 모여 월례회를 통해 음악감상 등을 즐긴다. 현재 회원은 70여명.
매번 30여명 정도가 참석한다는 월례회에는 음악가를 초청해 연주와 설명을 듣거나 함께 공연장을 찾는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5월 정도에 이번 샌디에고 오페라 투어와 같은 또 다른 음악 여행을 시행할 예정이다.
현재 이주헌 회장과 우수동 부회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회원으로 가입하기 위한 자격조건은 고전음악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는 없다고 하며 연회비는 50달러. 문의 (323)356-1378


박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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