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색깔

2005-09-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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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롱아일랜드)

9월로 접어들면서 자연의 변화가 여러 모양으로 가을 냄새를 풍기는 것 같다. 우선 하늘이 한결 높푸르게 보이고, 공기의 신선함과 스치는 바람결 또한 매끄러움을 느끼게 한다.정녕 가을이로구나 생각하니 문득가수 이동원이 부른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가 생각난다. “그대를 위한 가을의 노래는/비올라의 선율/피카소의 색채”라고 이동원은 쉰 목소리를 토
해내며 몸부림친다.피카소가 가을을 무슨 색깔로 표현했는지 모르겠으나 가을에 연상되는 색채는 황금색이 아니면 청색이다.

‘9월’이라는 시에서 헬만 헷세는 황금색을 말하고 있다. 키츠는 그의 시 ‘가을의 노래’에서 청색을 노래했다. 화가들도 가을의 느낌을 주로 황금색이나 청색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가을을 주제로 한 그림에는 황금색이나 청색이 가장 많이 쓰인다. 색채에 따라 느껴지는 감정 또한 다르다. 적색이 정열을 연상시키듯 청색은 멜랑꼬리한 감정을 안겨준다. 청색을 주로 사용한 피카소의 그림들이 유난히 침울해 보이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음에 민감한 음악가는 색채에도 예민했던 것 같다. 후란츠 리스트(F. Liszt)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 가끔 “청색을 더 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애조(哀調)를 띠게 하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애상(哀傷)을 느끼게 하는 청색에 비겨 황금색은 매우 화려하다고 하겠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F장조를 황금색으로 비유했었다. F장조란 작곡가들이 장엄하고 명랑한 곡을 쓸 때 흔히 쓰는 것이다. 같은 가을이라도 오곡이 무르익은 9월에는 천지가 황금색으로 뒤덮인다. 그리고 풍요한 수확은 사람들의 마음을 흐뭇한 행복감으로 채워 놓는다. 고독의 감상(感傷)에 젖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황금색들도 자연이 화장(化粧)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F장조인 것이다. 그러나 10월에 접어들 것 같으면 F장조는 단조(短調)로 바뀌게 될 것이다. 청색이 차갑게 가라앉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가을의 짜릿한 참맛을 느끼게 하는 것도 10월이다. 추석도 내일 모레로 다가오고, 조석으로 부는 산들바람을 흔히 가을 바람이라 말하지만 9월에는 아직 가을의 쓸쓸한 풍경이 펼쳐지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 내내 뜨겁게 단 몸이 아직도 채 식지 않아 저녁에 뜰에 나가 몸을 식히며 쳐다보는 달은 완연히 가을 달이다. 그런 달을 살기에 너무 바빠서인지 쳐다보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언제부터 가을 달이 뜨기 시작했는지 조차 알 턱이 없는 것이다.가을 달과 같은 심경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그만큼 문명의 찌꺼기(pollution)에 사람들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일까?
옛 사람들은 비록 오늘날과 같은 과학 문명의 편의는 누리지 못했을 망정 마음의 여유는 넉넉해 당나라의 시승(詩僧) 한산(寒山)은 ‘吾心以秋月/碧潭淸皎潔’(내 마음 가을달처럼 밝고, 골짜기 푸른 물 위에 교교하게 비치고 있다)고 가을을 노래했었다. 이 때의 가을 달이란 마음의 근원적인 것을 상징한 것이다.사람의 감정은 어느 한 때도 조용한 때가 없는 것이다. 일평생을 희노애락(喜怒哀樂) 중의 한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밑바닥을 찾아볼 것 같으면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 순수한 인간성이 있을 것이다.

가을 달은 이제부터 점점 더 밝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자연은 이처럼 동서고금이 여전한데 인간사회는 어찌하여 날로 흉악해지기만 하는 것일까?
아무리 이 때가 말세라고는 하지만 인간성이 어디까지 악화될 것인지 불안하고 안타깝기만 하니 도대체 인간의 본성은 ‘성악설(性惡說, 순자의 설)’이 맞는 것인지 ‘성선설(性善說, 맹자의 설)’이 맞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그 옛날 예수는 사람들이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날이 맑겠고 아침 하늘이 붉으면 날이 궂겠다고 하루의 천기는 분별하면서 어찌하여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한탄하였는데 현대인은 자연의 변화에 조차 둔감한 상태이니 어디에 가서 호소할 것이며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단 말인가!

‘천지인간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란 말은 이제 더 이상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닌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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