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자카란다 꽃잎이 질 때’

2005-06-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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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잡을 수 없는 꿈의 자락을 놓치고선 홀연히 눈이 떠진 이른 아침이면 보랏빛 자카란다 꽃가지가 우거진 남가주 호젓한 주택가로 오라.
간 밤 그 꿈의 굽이마다 둥지를 틀었던 상념의 알들은 어느새 부화되어, 먼동과 함께 속절없이 새가 되어 날아갔다. 새들은 하나하나 치솟아 오르며 소리 없는 축포를 차례로 줄지어 터뜨리고, 바람에 흩어지지 않는 보랏빛 포연은 한참이나 소리 없이 마을길을 덮고 있다. 새들은 날아가며 둥지마다 깃털을 흐뜨려 인도에도 차도에도, 내어놓은 쓰레기통에도 둥그러이 점묘화의 작은 붓자국들을 남긴다.
자카란다는 우리에겐 이방인이다.
한꺼번에 피어나 한꺼번에 지는 벚꽃마냥 눈부시게 애절하거나 잔인하지도 않고, 흰 적삼 소매 여미며 기다리다 기다리다 뚝 뚝 떨어지고야 마는 모란도 아니다. 풍만함과 여유로 가득한 짙붉은 작약도, 찬 눈 속에 홀로 매서운 향기를 자랑하는 매화도 아니다. 어느덧 피어나 오래 그대로 있으며 이윽고 소소히 떨어지는 부드럽고 잘디잔 자카란다의 꽃잎은, 보랏빛 눈연지에 보랏빛 샌들, 보랏빛 깃털 손부채를 들고 긴 봄을 즐기는 고대 이집트의 왕녀와 같다.
그 왕녀와 함께 걸어간다. 오톨도톨한 벽돌 보도를 건너 그늘이 서늘한 네 거리를 지나. 어느 집 앞에는 스프링클러에 젖은 신문뭉치가 간밤의 갖가지 소식들을 움켜쥐고 엎디어 있고 건넛집 우편함 둘레에는 며칠째 미처 거두지 못한 잡다한 소식들이 꿩 구워먹은 자리마냥 흩어져 있다. 이 사라진 아이를 보셨나요, 이 가구 세트를 놓치지 마세요, 중요한 메세지에요 버리지 마세요, 반드시 이름 적힌 임자가 바로 뜯어보세요. 왕녀는 그 위에도 한 줌 꽃잎을 흩뿌려 그들의 안락사를 축복한다.
한참 걸어 주택가가 끝나면 아직 문을 안 연 가게들이 주인의 출근을 기다리고 미처 전등을 안 끈 모텔 앞, 모퉁이가 깨어진 입 간판에도 자카란다의 꽃 그늘이 드리운다. 거기를 지나치면 창고와 사무실들. 앞대가리만 남은 커다란 트럭이 길가에 붙어 늦잠을 잔다. 그 아름드리 싱싱한 고무 바퀴에도 꽃잎은 떨어지고 검고 빛나는 본네트 위에 비친 일그러진 나의 얼굴에도 떨어진다.
마을길은 조금 언덕으로 올라가고 왕녀는 이제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버린다. 구름 없는 하늘은 파랗게 트이고 그 너머 저 멀리 높은 산엔 먹다 남긴 아이스크림처럼 흰 눈이 조금 남아 있다. 되돌아 앉아 조금 높은 곳에서 왕녀가 숨어 버린 마을을 굽어본다.
언젠가 오래 전엔가 와 본 듯하다. 꽃그늘에 쌓인 저 마을. 저 한 쪽 끝에 조금 지붕이 보이는 저 집. 거기엔 아직 두 아이가 늦잠을 자고 있고 아내는 이제쯤 뜨락 쪽 창문을 열었을까?
그들이 누구일까? 언젠가 만났던 사람들일까? 여기가 어디일까? 왜 여기에 와 있을까? 군데군데 흩뿌려진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을 즈려밟고 익숙하면서 낯선 길을 되돌아 천천히 걸어가는, 이 순간 오직 걸어 갈 뿐인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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