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욕 평통은 정치단체인가

2004-03-2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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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소(뉴저지)

민주평통자문회의 뉴욕협의회가 로컬신문 13일자에 전면광고로 <탄핵소추에 대한 뉴욕평통 결의>를 발표했다. 부제로 “국가 위기를 초래한 국회의원 전원은 사퇴해야”된다고 주장한 결의문을 보면 그야말로 주먹같은 큰 활자를 써서 한층 더 뜻을 강조하고 있다.

<뉴욕평통>이 결의한 3개항 전문을 독자와 함께 한 번 더 읽어보면
1. 헌법재판소는 지체없이 국헌을 수호하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엄격하고 정의로운 법리 해석을 내릴 것.
2. 탄핵정국 배후에 숨겨진 어떠한 음모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의 뜻을 배반하고 국가 위기를 초래한 국회의원은 전원 사퇴할 것.
3. 국무총리는 초당적인 입장에서 흔들림 없이 국정대행 업무에 만전을 기할 것이며 공명정대한 4.15 총선을 실시할 것 등이다.


3개항의 결의 내용은 마치 최고의 권력기관이 하급 기관에 내린 행정명령 같기도 하고, 혹은 구국결사단체가 내놓은 대정부 성명전 같기도 해서 입맛이 씁쓸해진다. 그러니까 <뉴욕평통>은 헌법재판소 판사와 국무총리를 향해서 준엄한 직무 수행을 명령하고, 탄핵표결에 임한 국회의원 전원에게는 당장 사퇴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소설적으로 한 번 더 비유하자면, 마상에 높이 올라앉은 장군이 녹슬은 칼을 빼들고 병졸을 향해 “내 말 들을래, 안 들을래” 하고 큰소리 쳐 으름짱을 놓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도무지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라는, 부드러운 이름의 이미지와는 걸맞지 않아 보인다.

뉴욕이면 뉴욕, 한 지역의 생활 공동체라는 함수관계는 한 개인의 언행이 잘못되어 사회단체에 불이익을 끼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한 단체의 비애국적인 행동규범이 동포 개개인의 불명예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단체나 개인이나를 막론하고(특히 이민사회에서) 무슨 대의명분적인 일을 할 때는 전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를 먼저 생
각해 보아야 한다.

<뉴욕평통>은 결의문에서 자신들은 “성숙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경험하며 살았으며 한국정치의 저급함과 부패상이 주류 미디어에 비칠 때마다 치욕을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런 당사자들이 작성한 결의문이 왜 그렇게 민주적이지 못한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극히 정치적인 용어를 구사하고 있다. 평통은 정치단체가 아니다. 단지 헌법기관의 한 기구로서, 분단된 한반도의 민주 평화통일을 이룩해 내기 위한 이상에 목적을 두고 구성된 자문회의 기관이다. 좀 더 쉬운 말로 표현하면 통일에필요한 아이디어를 모아 함께 의논해 보는 협의체인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평통 결의문을 냉정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살펴보면, 해외동포의 입장에 서서 고국의 탄핵사태를 걱정했다기 보다 누군가에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작성됐음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뉴욕평통>에 대한 일반동포들의 평가가 별로 좋지 않게 나 있다는 사실도 차제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전임자들의 임기가 끝나고 후임자가 결정될 때마다 공공연한 자격 시비가 일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동포들은 노골적으로 평통을 <어용단체>라고 부른다. 왜 그런가를 한번 생각 해보라.

고국이 어려우면 조용히 지켜나 보면서 마음속으로 성원을 보내고 걱정할 일이지 <뉴욕평통>이 언제부터 동포사회를 대변하는 정치단체가 됐다고 전면광고를 내 탄핵소추 책임을 규탄하는 정치연출을 하는가. “성숙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실제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고 결의서에서 밝힌 것처럼 값지게 터득한 진리가 있으면 동포사회를 위해 먼저 펼쳐보일 일이다.

<뉴욕평통>은 조용히 본연의 업무에나 정진해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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