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004-03-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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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논설위원)

요즘 국내외로 시국이 어지럽다 보니 갑자기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생각난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무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일제치하 조국 상실의 비애와 울분, 그리고 광복에의 염원, 의구심을 다룬 내용의 시다. 이상화 시인은 이 시를 통해 당대의 어두운 현실을 바라보며 자조적인 서러움과 절망을 표출하면서 봄의 생명감과 희망을 노래하고 참된 기쁨과 생명의 자유를 구가했다. 그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공허감과 상실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무언지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이 빼앗긴 것 같은 현실이다. 봄은 왔지만 우리들의 마음은 여전히 겨울을 못 벗어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언제 또 테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안에다 우리의 고국인 한국의 정치나 사회상황도 혼미의 소용돌이 속에 어지러울 대로 어지럽다. 한국이나 이곳의 경제도 여전히 불황을 면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도 당장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조지 W. 부시, 존 케리 양 후보간의 비방전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유혈충돌
은 여전히 그칠 줄 모르며 대만 경우도 최근 실시한 대통령선거가 부정이 개입됐다고 주장하며 야당이 들고 일어나 나라 전체가 들먹이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그만큼 숨가쁘고 복잡하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 사회적으로 어느 곳을 보아도 조용하고 안정된 곳이 없다. 특히 한국에서 빚어진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가결 소식은 때아니게 찾아온 꽃샘추위와 함께 마음까지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이런 환경에서 과연 우리들의 마음에 진정한 봄이 찾아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의 조국인 한국은 재벌과 권력층의 횡포로 맥놓고 있던 수많은 국민들이 그들의 놀음 아래 눈뜨고 코 베 가는 줄 모르고 이리 저리 당하며 살아왔다.

치부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그들의 횡포 속에서 빼앗기고 유린당하고 탈취 당하면서 그래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견뎌왔다.

온갖 추위와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아 봄의 싹을 틔우려고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다. 봄이란 계절 자체가 ‘난산 끝에 태동’ 이라고 폭설과 폭풍우, 한파 등 온갖 수난을 겪고 피어나는 시기이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면 분명 봄은 우리에게 찾아온다. 언제 그런 추위가 있었느냐는 듯 지구촌 곳곳에 그리고 뭇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찾아들 것이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이라크 전쟁터에도, 바그다드 테러 폭탄 현장에도 봄은 어김없이 오게 되어 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주민들과 독재정권 밑에서 인권을 유린당하고 신음하는 북한의 백성들에게도 봄은 오게 마련이다.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 몸부림치는 두고온 내 고국 땅의 동족과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국내외 동포들에게도 봄은 분명 올 것이다.


지금은 버드나무 가지에 파릇파릇 물이 오를 시기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폭설에 나오던 새싹도 다시 움츠려 들고 말았다. 다시 나오자면 또 기다려야 한다. 꽃샘추위가 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봄의 시간이 빼앗기고 있다. 한국은 이번에 100년만에 내린 폭설로 굉장한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눈으로 인한 피해만도 연 1,000억이라는데 정치, 경제는 물론이고 기후도 이러니까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뉴스를 통해서도 이번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다 주저앉아 농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민심을 대변하는 국회의원들은 이런 데나 신경 쓰지 엉뚱한 데에만 관심을 쏟고 있으니 그들의 마음에 봄이 오기란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곳 한인사회에도 눈, 비가 계속 오는 데다 여전히 차가운 기온에 바람까지 불어 봄이 더욱 늦춰지고 있다. 봄이 되면서 경기가 풀리려나 기대를 하다가 추위 때문에 경기가 도로 움츠러져 마음은 여전히 겨울이다. 장사꾼은 물론, 직장인들까지 봄이 왔어도 봄인지, 겨울인지 도무지 분간을 못하고 있다. 희망과 설레임, 환희와 기쁨, 소생의 활력을 불어넣어 줄 봄은 정말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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