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관념의 병

2004-03-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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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길(수필가)

우리는 젊은 시절에 <행운의 편지>라는 것을 한두번 받아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나폴레온>이 전장에서 네잎 클로버를 꺾으려고 허리를 구부리는 순간 총알을 피하하여 죽음을 면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끝에는 이 편지를 복사해서 몇 사람에게 전하면 행운이 오고 그렇지 않고 무시하면 불행이 닥친다는 위
협적인 글로 행운의 편지는 끝났다.

나는 종일 궁리를 하다가 그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잊기로 했었다. 그러나 마음은 여러 날 개운하지 못했다.우리는 생활 속에서 무엇을 하면 행운이 오고 무엇을 안 하면 재수가 없다는 식의 관념의 병에 갇히어 살아가고 있다. 이 병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이 되어 어떤 이는 상당히 중증으로 심각한 정도이다.


아침에 까치가 나무에 와서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오신다. 엿을 먹으면 시험에 붙는다고 이 사람 저 사람 엿을 잔뜩 선물한다. 영업 장소에서 휘파람을 불면 재수가 없다고 어떤 사장님은 직원이 휘파람을 불었다고 과잉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다.

상여가 지나가는 것을 보면 재수가 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왜 재수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에 여자가 자기 앞을 가로 건너면 그 날 재수도 물 건너가고 택시기사는 아침 첫 손님으로 안경 쓴 여자를 피한다는 말도 있다. 장사하는 이들도 첫 손님을 잘 만나야 한다. 반품이 들어오거나 까다로운 손님을 만나면 그 날 장사는 옴 붙는다고 한다. 돌이나 솔가지가 무더기진 당산 나무나 성황당 앞을 그냥 지나가는 것도 꺼림직하다. 고수레를 잘 해야 농사가 잘 되고 용왕제를 잘 지내야 풍어가 든다고 믿는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님이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 의사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동네 아줌마들은 굿을 해야 한다고 어머님을 꼬드겼다. 어머님도 종내는 굿을 해주기를 바랐다. 밤새도록 울리는 징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숫자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성서에도 7이나 12는 완성의 숫자로 자주 나온다. <럭키 세븐>이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 영미인이 즐겨 쓰는 12진법도 여기서 유래됐을 것이다. 666은 기독교인을 탄압한 <네로>의 이름 풀이라고 해서 악마의 숫자라고 싫어한다. 예수님을 배반한 12번째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포함하면 13번째다.

미국인들은 13을 싫어한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금요일이라 해서 금요일도 싫어한다. 13일에 금요일이 겹치면 아주 기분 나쁜 날이라고 외출마저 꺼린다. <써틴 후라이데이>라는 으스스한 영화를 만들어 한 번 더 사람들은 떤다.

한국에서도 넉 사(四)를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고 싫어한다. 호텔에는 사층도 사호실도 없다. 외국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중국인들도 시계(針)와 총(銃)이 발음이 같다고 시계는 선물로 주고 받는 것을 꺼려한다. 우리 생각에는 옷을 일이다.

우리들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종교적인 믿음이 약하고 신념이 부족한 사람들은 무엇인가 다른 것에 의지해 보고 싶어한다. 이사를 가고 사업을 시작하며 결혼하는 문제까지 점쟁이를 찾는다. 점쟁이가 안 좋다 하면 괜히 꺼림직하다. 시키는대로 부적을 안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점쟁이가 시키는대로 했더니 마음도 안정되고 일이 잘 풀렸다면 그 때부터 우리는 관념의 병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관념의 병에 깊이 빠지면 우리의 마음은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롭지 못한 마음은 진리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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