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륜(年輪)

2004-03-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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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기(롱아일랜드)

알라스카를 여행할 때 700여년 전 나무를 잘라 보관한 것을 보면서 여름에 두껍게, 겨울엔 촘촘히 둥근 테를 그리며 긴 세월 풍상을 살아간 자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눈보라를 겪고 자란 추운 지방의 나무일수록 목재로서의 가치가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음질을 낼 수 있는 바이얼린의 재료는 몹시 춥고 매서운 바람부는 산 위에서 자란 나무이어야만 한다는 예길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사람도 쓰라린 아픔과 고통,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해서만 모가 깎이고 성숙해지며 인생의 참맛을 내게 되는지도 모른다. 폭풍 없는 바다, 모글 없는 스키장, 가파르고 장애 없는 동산, 강한 상대가 없는 싸움, 겨울 없는 봄, 그런 것들은 참으로 삶을 무미건조하게 할 뿐 아니라 김빠지게 하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자랄 적에 60세만 되어도 상노인 행세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예방의학과 의술의 발달, 위생주거환경의 개선과 영양관리 등으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면서 요즘엔 60세면 젊은 축에 속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토록 날아가는 세월에 고삐를 물리고 구슬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남은 날, 계수하는 지혜를 간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선 이태백, 38선, 사오정, 오륙도 등
신조어들이 모두가 심각한 직장문제에 관해 빗대어 말하고 있다.

천한 직종은 외국인이나 연변족들이 맡아 하고 원하는 직종은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고 그마저 직장 얻어 일 할만 하면 떠밀려 나가야만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 사람마다 정신연령과 육체연령이 각각 다르긴 하지만 103세까지 일할 수 있는 사회와 56세까지 일하면 도둑으로 모는 사회간에는 뭔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잘 아는 고객 중에 아이들 다 키워 대학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데 지난 학기에 법과대학엘 들어간 부인이 있다.

남편은 안과의사이고 항상 반듯하고 예의 바르며 헝클어짐 없이 친절한 사람인데 뒤늦게 그런 용기와 결단을 한 것을 칭찬했더니 나 보고도 결코 늦지 않았으니 새로운 설계를 세워 도전하면 삶은 그만큼 새로워진다고 했다.

교회 권사님 한 분도 아이들 교육 다 시키고 직장 은퇴한 후 학교로 돌아가 석사과정을 밟고있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도전은 항상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얼마 전 100세로 타계한 밥 호프는 평생동안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세계 각국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아직도 손수 목수일을 하면서 땀 흘리고 있다. 그는 어려운 일들이 있을 때마다 자원해서 달려가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도 노구를 이끌고 세계 평화를 추구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전직 정치지도자들과 비교하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고집과 편견이 더 세지고 편협해지며 타협할 줄도 모를 뿐 아니라 이해와 용서도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끝을 맺는가 하는 것이다. 30여년 전 함께 교회를 섬겼던 LA의 P목사가 얼마 전 원로목사 추대를 사양하고 스스로 은퇴하는 것을 보면서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처럼 미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아침 노을 못지 않게 지는 황혼도 아름답다. 타는 꽃도 곱지만 떨어지는 꽃잎의 향기도 가슴에 베어 스며들어 길게 남는다. 비바람 견뎌내고 잘리우고 깎이어 훌륭한 목재가 되고 아름다운 음악을 내듯이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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