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아킬레스건

2004-03-12 (금)
크게 작게
민병임(편집국 부국장)

올해 말 미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은 사력을 다하여 선거 운동 중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 캠페인을 위해 제작한 첫 TV 광고는 지난 4일부터 전국 18개주 80개 지역에서 방영되었는데 그중 ‘9.11’ 테러 관련 장면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의 잔해 속에서 펄럭이는 성조기를 클로즈업 장면을 포함한 광고와 WTC 잔해 속에서 구조요원들이 성조기에 뒤덮인 시신을 발굴해 옮기는 장면이 담긴 또 한편의 광고는 야당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의 “국가적 비극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9.11 희생자 유족들도 “표를 끌어 모으기 위해 피해자 가족의 상처를 들쑤신 것은 최소한의 정치적 윤리마저 저버린 처사”라고 부시 대통령을 성토했다.


이에 부시 대통령 선거운동 본부의 홍보책임자는 “9.11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어진 중대한 사건이었고 차기지도자는 이 전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광고”였다고 주장한다.이 광고로 인한 논란을 지켜보며 바로 얼마전인 2월 중순, 한반도를 왈칵 뒤집어놓았던 이승연의 정신대 누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종군 위안부를 주제로 한 탤런트 이승연의 누드 프로젝트는 역사에 희생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울렸다.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검버섯이 핀 손으로 닦아내던 할머니에게 위안부 누드 기획사 네띠앙엔터테인먼트는 “종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일 관계를 재조명하려는 취지일뿐 상업적인 목적은 아니다”고 강변하며 2차 일본 3차 네팔 촬영을 강행하
려 했다.

이들의 엽기적인 발상과 이기적인 상업성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아픔을 건드려 결국 이승연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찾아가 무릎꿇고 사죄했고 1차 촬영분 사진과 동영상 필름을 소각시켰다.

뼈아픈 역사를 상품화해 돈을 벌려고 한 누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지만 가슴에 상처 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은 아직도 그치지 않았다.9.11 참사장면은‘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튼튼한 국가 안보의 필요성에 관한 중요하고도 객관적인 교훈이 될 것’이라지만 그 화면에 등장한 들것에 실린 시신이나 그 가족, WTC 잔해 분진과 연기로 인해 후유증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은 무엇인가? 또 테러라면 진저리를 치는 뉴요커들은 왜 다시 그 장면을 상기해야 하는가.

물론 국경일이나 추모제에서는 다시 9.11 기억을 떠올려야 하고 전쟁을 앞두었거나 국가의 위기시에는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번 광고 장면은 선거홍보전략에 이용한 것이 아닌가.

독립선언서, 자유의 여신상, 뉴욕의 마천루 등등 위풍당당한 미국을 나타내는 상징은 얼마든지 있다. 광고 아이디어가 아무리 없어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나약하고 힘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면 화가 나는 법이다. 또 한 점 오차가 없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한가지의 치부, 결코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이는 절대로 건드려서 안된다.

뉴욕의 한인사회는 어떤가. 내가 무심코 상대방을 위한다고 시작한 일이 그 사람에게는 위로가 아니라 동정으로 여겨지고 치욕으로 여겨진다면 안하는 것이 낫다. 말 한마디도 그렇다. 나는 그 당시 참으로 절박했기에, 마음이 허전하여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속내를 보였는데 믿고 얘기한 말이 나중에 세상을 떠돌아다닌다면 그 배신감을 어찌할 것인가.

내가 직접 세상에 대고 떠든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한 사람 혹은 두어 사람에게 속을 보인 것이 정확하지도 않은 채 껍데기만 돌아다닌다면 그 상처가 수습되지 않는다.인간관계를 잘 하려면 어느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이 무엇인가를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