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간아, 인간아!

2004-03-10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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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명훈(의사)

크리스찬이라면 부활절 그리고 성탄절을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은 아마 드물다고 생각하지만 금년에는 그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해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재의 수요일을 맞아 세인들의 관심 속에 전국에 일제히 개봉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을 감상하면서 스크린에 넘쳐흐르는 폭력에 시종 압도 당하다가 목이 졸려 질식사 직전에 숨결을 되돌리는 것 같은 안도감, 해방감을 맛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뛸듯이 기쁜 그런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 현장에 서 있게 되었고, 군중과 함께 질시와 증오, 위선, 그리고 야비한 폭력을 조장하는 방조자의 굴레를 벗지 못하면서도(내게는 저들을 막아 설 용기가 없었다) 저 무자비한 폭행을 인내하는 예수의 편에 서 보기도 하지만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에 공감하기엔 속물인 내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이 가장 잔인한 동물(?)”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가증스런 폭행이 동원되고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살이 찢기고 피가 튀어도 인내하는 모습, 인간이 저렇게도 잔악할 수 있는 것인지, 또 인간으로써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의 한계점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처절함에 몸서리를 치며 나는 군중과 예수 사이에서 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이 분노에 의한 것인지, 연민의 정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 죄를 비는 것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마 복합된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는 용서한다, 사랑한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우리 인간의 기본권이나 존엄성을 짓밟는 존재를 쉽게 용서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은 인간의 일반 정서라고 생각한다. 용서란 용서를 받는 대상이 왜 용서가 필요한지를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이 영화를 단지 역사적 사실이며 유대인만이 저지른 박해 정도로 생각하면 숲 속에서 나무
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 유대인들을 바꾸어 말하면 너와 나, 우리
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군중 ;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 군중일 수도 있고 또 나와 이 군중은 앞에서 위선자가 흔드는 깃발의 비호 아래 쉽게 이성을 잃기도 하고 폭력의 당위성을 주장할 수도 있는 악의 세력으로 전락하는 모든 인간들을 지칭한다고 봐야 타당할 것이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없다”고 하지만 예수는 고통을 초래한 악의 모든 것들을 신이 아닌 한 인간으로써 인내하면서 그들을, 아니 우리를 위해 용서를 빌고 또 사랑을 요구한다.악의 세력을 이기는 길,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사랑 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하지만 금년처럼 2천년 전의 역사적 사실을 시공을 초월해서 현장으로 안내해준 한 가톨릭 신자에게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인간아, 인간아, 이 불쌍한 인간들아, 이제는 알아 듣겠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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