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조선(古朝鮮)과 중국

2004-03-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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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선(브루클린)

고조선은 흔히 우리가 이름짓는 이씨조선(李氏朝鮮)과 구분하기 위해 옛 고(古)자를 붙여 조선이라는 고대 종족 또는 고대 국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중국의 손진기(孫進己) 등이 억지 주장하는 고구려 역사같이, 고조선의 역사에도 중국의 짜맞추기로 시작된다.


고조선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조선을 말한다.
고구려 역사가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듯이 고조선의 판란적인 역사도 중국 사서에 나타나는 문귀를 모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BC 7세기경, 중국에서 편찬된 관자(管子)라는 책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기자조선의 기자는 은(殷)나라 말 주(周)나라 초 사람이다. 비간과 더불어 은나라 3대 현인이었던 기자는 은의 주왕에 의해 투옥되지만 주나라가 은을 정복하고 기자를 석방하자 기자는 은나라 충신으로 주나라 우왕을 탐탁치 않게 여겨 조선으로 도망하였다고 중국 사서
들은 전한다.

또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위만 역시 중국의 연나라 노관(盧琯)이 한(漢) 왕조에 반(反)해 흉노로 도망가자, 위만도 조선으로 도주하였다고 사기·한서·삼국지는 말하고 있다.

고조선의 두 시조가 중국을 버리고 도망한 자들로 되어 있는 중국 사서들의 위계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사기(史記)에 나타난 한나라 초 중국과 인접했던 흉노·조선·동월·남월·서남이 5개국은 모두 중국의 망명자가 왕조를 연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주(周) 왕실과 한(漢) 왕실의 통치자가 지니고 있었던 혹은
사가들이 구현하고 싶었던 자기주의식 표현임이 틀림없겠다.

비교적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는 위만은 조선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위만이 기자조선을 찬탈하기까지 고조선은 하나의 왕조가 지배했다. 그 왕조의 성은 기(箕)씨도 아니고 자(子)씨도 아닌 한(韓)씨 성을 가진 왕 위만이 왕검성을 점령하자 배를 타고 남으로 도주하였다고 이병도씨는 주장했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기자조선을 빼앗은 위만은 연나라 노관의 수하로 한나라의 세력을 피해 연나라를 탈출할 때 입었던 복장이 호복(胡服)으로 바지 저고리였으며 상투를 틀었다고 사기는 전한다. 이는 중국인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사마천이 조선을 중국의 한 영지국가로 만들려 했으나 미처 간과하지 못했던 부분이 아니겠는가.


중국은 자국의 정세가 혼란스럽거나 세력이 약할 때는 국내 정치에 전념하거나 인접 영지 국가와 전쟁을 했다.

그러다 이민족(異民族)에게 침략과 정복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민족이
침략해 세운 원나라와 청나라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국력이 강성해지고 정세가 안정되면 중국은 힘을 분출했다. 그리고 강압과 고차원의 술수로 인접국 위에 군림했다.

중국은 지금 안정된 정치·경제력으로 국력을 신장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다시 눈 뜨고 있는 우리들의 코를 베어가려 한다.

중국의 음흉한 덫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 모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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