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루운’ 큰 사람, 그 ‘님’!

2004-03-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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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3월의 창문을 열면 내 마음의 정원 어느 곳에서 ‘風蘭花 매운 향내도 따르지 못할’ 짙은 향기와 함께 내게 다가오는 이름 석자가 있다. 크나큰 이미지와 함께 오는 그 향기는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초상과 함께 늘 그렇게 조용히 내게 다가오곤 한다.

그 향기의 주인공은 만해 한용운 선생이다. 나는 선생을 뵈온 적이 없다. 선생은 해방동이인 내가 태어나기 일년 전에 안타깝게 입적하신 분이지만 선생의 모든 면을 사모하고 존경하셨던 내 아버지로 인해 나 또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가 심어준 이미지로서의 선생의 초상을 내 가슴에 간직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선생은 내 아버지의 맨토(mento)였을 것이라는 생각, 내 아버지의 遺風이 선생을 많이 닮아보인다는 연유에서일까? 선생의 향기는 내 아버지의 향기와 더불어 내 마음에 머물러 나를 움직이고 있다.


내 아버지는 위당 정인보 선생의 표현을 빌어 선생의 인품에서 나는 향내를 ‘매운 향내’라 하였다. “고매한 인격과 식견은 본디 그윽한 향기를 지니는 법이지만, 그 향내의 짙음이 맵다는 표현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선생의 지조 높이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발언”이라 하시며 선생의 그런 향기는 바로 학식과 예지와 정서가 무르녹은 더 근원적인 기품에
서 우러난 것이기에 그 준열(峻烈), 그 애수가 지금도 문득 우리의 심두를 울리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시인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였고 불교의 석학이었고 사상가로서 우리 근대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한국이 낳은 고사요, 애국지사이자 불학의 석덕이며 문단의 거벽이었다. 선생의 진면목은 이 세 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고도 하셨다.

1919년 1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 허상윤 등과 조선독립을 의논하고 3.1운동의 주동자로서 손병희 선생과 거유 곽종석 선생을 포섭하였고, 참여를 주저하던 모씨를 위협 설득하여 마침내 쾌락을 받아내고 최남선이 작성한 조선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3장을 첨가하고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
고 투옥되었다.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벌이고 1943년 조선인 학병 반대운동을 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선생은 현실에 즉한 호국불교, 대중불교가 염원이셨다. 선생의 지조는 이 때문에 한갖 소극적 은둔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인 항쟁의 성격을 띠었다.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민족과 佛을 일체화한 ‘님’에의 가없는 사모였다. 선생의 문학은 비분강개와 기다리고 하소연하는 것과 자연관조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 비분강개는 지조에서, 자연관조는 禪에서 온 것이라 한다면 그 두 면을 조화시켜 놓은 사람과 하소연의 정서에서 가장 높은 경지를 성취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쓰신 한용운론은 스스로 밝히고 있듯 “선생의 유풍을 추앙함에 무슨 도움이 될까하여 아무 자료도 없이 기억을 더듬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본 한용운선생은 이렇다는 말이다” 같이 주로 선생의 인품, 성격, 사상, 지조, 신년, 시세계 등 다양하게 골격적 핵심만 짚은 것으로 일송 김동삼 선생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셨을 때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서 감옥 구내에 버려둔 것을 선생께서 결연히 일어나 성북동 꼭대기 심우장까지 관을 옮겨다 모셔놓고 장사를 치루실 때 그 때 아버지도 장례에 참석하셨는데 일제의 말기라 때가 때인 만큼 20명 안팎의 會葬者 속에 묵묵히 정립하여 추연하시던 선생의 모습이 당신이 선생을 뵈운 마지막 모습이기 때문에 감회가 한층 깊은 바 있다시며 선생의 모습에는 남들이 모르는 ‘多情多恨의 人’을 피력하시며 글을 마무리 지으셨는데 그 때가 내 나이 13살이었던 1958년이었다.

포악한 일제의 발굽 아래 신음하며 “해 저문 벌판에서 들어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을 인도하시던 선생은 한국의 모세요, “이를 위해 살신성인한 의열의 士를 보여주신 선생은 마치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숨어서 활동하시지 않고 적나라하게 한정 累를 용서하지 않으신 선생은 민족정기의 지표였고 정신의 기둥이 되셨다. 신념을 위해서는 천하에 두려운 것이 없으셨던 「님」, 우왕좌왕 혼란에 빠진 오늘날 한국을 우려하니 「님의 침묵」이 야속타. 선생이 ‘기루운’(그리운) 삼일절이다.

조광렬(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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