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이사와 도둑

2004-02-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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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부터 이사갈 집을 보러 다니다가 마침내 한 집을 발견해 이번 2월에 14년간 살던 아파트에서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예약 없이 남의 집 구석구석을 샅샅이 아무 거리낌없이 볼 수 있는 것은 오픈 하우스때이다.그동안 길을 가다가 ‘오픈 하우스’ 팻말만 붙어있으면 들어가서 내부를 보았는데 그 때마다 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살림살이에 둘러싸여 일생을 사는 구나 하는 것이었다.

하루 세 끼 밥 먹고 자고 하는 공간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다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가재도구들을 끼고 사는지, 가구·옷·부엌 살림살이·가족사진 액자 등 ‘참으로 짐이 많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사돈 남말 한다’고 정작 우리가 이사갈 때 웬 그리 허접스런 짐이 많은지 이삿짐 배달 트럭으로도 모자라 밴으로 화분 등을 날라야 했고 다시 또 물건의 노예가 되어 살고있다. 남들이 들으면 어이없다고 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 살고있는 집을 처음 보러온 날, 뒷뜰의 아주 자그마한 채소밭 한쪽에 놓인 장독대가 마음을 잡아끌었다.

같은 한국사람인 전 주인이 잔디밭 대신 부추, 고추, 상추, 깻잎 등을 재배했다는 채소밭 옆에 항아리 대여섯개가 올라갈 정도로 평평한 넓적바위가 장독대 역할을 하고있었다. 몸통이 오동통한 항아리들이 햇볕에 반질거리며 매끈한 자태를 자랑하는 것이 탄성을 자아냈다.

그런데 부동산 시장에 나온 그 집을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더니 어느 날 다시 가보니 장독대의 그 예쁜 항아리들이 하나도 없었다. 아주머니는 한국 마켓에서 크고 작은 것을 다양하게 구해 애지중지 하던 항아리를 몽땅 도둑맞고 참으로 애석해 했다. 아마도 고추장, 된장, 간장 항아리를 가져갈 사람은 같은 한인일 것이다.

최근 칼리지 포인트와 플러싱 등 한인밀집지역에 좀도둑이 늘었다고 한다.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건물 뒷편 유리창이나 문을 통해 침입, 절도행각을 벌인다는데 주로 현금이나 보석, 노트북 같이 쉽게 들고 나가는 것을 집어간다고 한다.<본보 2월25일자 A4면>

가정, 업소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들어온다는 좀도둑을 방지하려면 현금을 집안에 두지 말고 알람 시스템을 갖춰 도둑을 미연에 방지하라고 경찰은 말한다. 외출시에 라디오나 TV도 켜놓고 집안 조명을 밝히며 배달된 우편물 등은 즉시 치우는 것이 범행 방지책의 하나라고도 한다.

새로운 집에 이사와서 새롭게 살려는 사람에게 도둑은 참으로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과거 대한민국이 아주 못살아 하루 세 끼 밥 먹기가 어려웠던 60년대초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들려왔다.“낮잠을 자고 났더니 마당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갔대.”,“점심 먹을 때도 있었는데 저녁 하려고 보니 부뚜막 위 수저통에서 은수저만 없어졌어.”,“ 이층 양옥집 옥상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고추를 누가 몽땅 걷어갔대.”,“현관에 놓인 신발도 반반한 것은 죄다 가져갔네”하는 말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하루 세 끼 밥은 먹는다. 우리가 살고있는 곳은 먹을 것이 지천에 널린 미국이다. 이 집에 살고 나서 아침에 눈뜨면 가장 먼저 커튼을 젖히고 뒷뜰의 장난감처럼 작은 장독대를 바라본다. 채 녹지 않은 잔설이 히끗히끗 남은 장독대위에 놓인 둥글둥글한 고추장, 된장 항아리들을 보면 그 질박함과 넉넉함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 속에는 80순이 훨씬 넘은 노모가 담근 된장, 고추장이 들어있다.

아파트에서 냄새나는 메주를 띄워서 만든 된장과 햇고추장이 소복이 담겨있는 이 장독을 새벽의 맑은 햇살아래, 주말이면 석양의 어스름아래, 캄캄한 밤에는 달빛아래 바라보는 마음을 부디 누군가 해치지 마시길. ‘도둑의 자존심’이 있지, 고추장·된장은 그 옛날 끼니 걱정하던 시대의 장물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믿는 수밖에 없다.

<민병임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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