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한국에 정치가 있나

2004-02-2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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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독자가 전화를 걸어와서 “왜 요즘은 한국정치에 대해글을 쓰지 않느냐”면서 좋은 글을 써달라고 필자에게 주문을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나서 요즘들어 한국의 정치에 너무도 무관심해진 나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언론계의 일선에서 정치를 살펴왔고, 어느 분야 보다도 정계에 지인이 가장 많았던 나는 정
치를 빼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한 평생 정치를 왈가왈부하면서 밥을 먹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정치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졌다. 신문에 연일 대문짝만한 활자로 한국정치 이야기가 실려도 그저 그런 이야기이겠지 하고 지나쳐 버린다. 한국 TV에서 한국정치 뉴스가 신나게 흘러나오면 오히려 뉴스를 외면할 때도 있다. 이렇게 관심이 없어졌으니 정치이야기를 쓰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미국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한국에 대한 관심은 점점 멀어지고 내가 살고 있는 주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렇게 한국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젊은 날,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왔다.

즉,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사랑할 수 없다(He who not love his country can love nothing)는 말을 지금도 나는 진리로 믿고 싶다.그러면 나는 왜 한국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접게 되었나. 그것은 한국에는 정치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어떻게 보면 스포츠 경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정치에도 스포츠처럼 선수들이 있고 선수들의 승패에 따라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응원팀이 있다. 그리고 경기 과정에 심판들이 있고 아무 이해관계 없이 경기에 열광하는 관중들도 있다. 선수나 응원단이나 심판이나 관중이나 모두 룰에 따라 승패를 겨루고 판정하고 구경하는 것이 스포츠 경기이다.

이 스포츠 경기를 정치에 비교하면 선수는 정치인들이고 응원팀은 정당이나 이익집단이며 심판들은 공권력이나 사법부, 여론에 해당하며 관중은 국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룰이 없을 때 선수들이 마구 반칙을 하는 것처럼 정치에 룰이 없으면 정치인들이 부정협잡을 일삼고 정당이나 이익집단이 집단이기에 몰두하고 심판들이 마구 호르라기를 불어대듯이 공권력과 여론을 남용 또는 오용, 선수들을 퇴장시키는 경기, 즉 정치는 엉망이 되고 관중이 경기를 외면하게 되니 이것이 곧 정치 불신과 무관심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일찌기 “정(政)은 정(正)”이라고 했다. 정치는 올바른 것, 즉 정치의 룰과 룰의 불편부당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는 도덕과 무관하다”고 했다. 정치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이기고 빼앗는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중 오늘의 한국정치는 마키아벨리의 후예들로 가득 채워졌으니 룰에 따라 스포츠경기를 해설하듯 정치를 말해야 할 우리같은 사람들이 설 자리는 사라진 셈이다.


우리는 김정일이 북한을 통치하고 있지만 그것을 진정한 정치로 보지 않는다. 또 북한을 나라 다운 나라라고 보기도 어려우며 김정일을 정치적 지도자라기 보다는 폭력으로 인민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잔인무도한 한 인간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에 룰이 없어 선수들이 마구 뛰고 심판들이 횡포를 부리는 경기처럼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라 폭력과 사기행각일 뿐이며 정치인은 폭력사기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는 정치 이야기가 아니라 사기꾼을 잡아내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앞으로 한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한국에서 어떤 끔찍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룰이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이런 강심장이 되어야 할 것 같다.

“한국에 정치가 있나” 지금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나는 반드시 그렇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내가 다시 정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한국에 살고있는 국민들은 물론 해외에 있는 한인들이 상실한 뜨거운 조국애를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기영(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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