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튀고 싶을 때가 있다

2004-0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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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로 튈까. 튀어봐야 거기인데 사람들은 튀고 싶어한다. 튀고 싶은 마음도 일종의 욕심인데 그 욕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튀고 싶은 욕망만 잠재운다면 모든 것이 다 평안해 질 걸, 욕망을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 욕망과 욕심은 필요악(必要惡)과 같은가. 욕망 없이, 욕심 없이 어떤 일이든 추진력(推進力)을 갖기란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욕망과 욕심은 본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닐까. 본능과 직결됨이란, 가장 원초적인 욕구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기에 그렇다. 원초적인 욕구에는 먹고 싶은 욕망, 갖고 싶은 욕망을 비롯해 튀고 싶은 욕망도 포함된다. 이런 것들은 욕망이라고 하기보다는 한계적 육신에 포함된 본능 내지는 근성이라 할 수도 있겠다.


각종 종교가 추구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 혹은 욕심을 줄이게 하는 일이다. 인간에게 욕심을 빼놓아 버린다면 인간은 성자(聖者)가 될 것이다. 그릇되게 하는 모든 인간만사가 모두 욕심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태어난 후 어미의 젓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인간 욕구가 얼마나 처절하냐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욕심과 욕망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억제하기 힘든 ‘시지프스의 신화’를 재현시킨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오는 짜라트스투라는 큰 바위를 높은 산에 굴려 올린다. 그러나 신(神)은 그 큰 바위를 다시 산 아래로 굴려 떨어트린다. 짜라트스투라는 다시 산을 내려가 큰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려간다. 이렇게 하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생이자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의 한계요 비극이며 삶이다. 이것은 비극(悲劇)이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희극(喜劇)도 될 수 있다.

요즘 한국에서는 탤런트 이승연이 곤혹을 치르고 있다. 정신대 위안부를 소재로 누드(본인과 기획사에서는 누드가 아니라 하지만)를 찍어 상업용으로 사용하려 했다는 것이 발단의 원인이다. 이승연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라고 백 배 사과를 했지만 할머니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녹이기에는 불충분했던 것 같다. 이런 해프닝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튀려고 하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기획사와 이승연은 절대, 정신대 할머니들을 욕보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지만, 정신대를 소재로 삼아 잘 나가는 탤런트의 옷을 벗기게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신창이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정신대 할머니들의 울분을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왜, 하필 소재가 정신대였나.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일본의 잔학상을 욕망이라는 인간의 상술이 들추어내어 조용히 살아가려는 할머니들을 건드린 것이다. 튀려고 하는 욕망이 빚어낸 한 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욕망이라는 전차의 두 바퀴 사이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을 갖고 태어나 욕망과 함께 살아간다. 사람은 뛰다 보면 힘이 든다. 힘이 들어 걷다 보면 서고 싶다. 서서 있다 보면 앉고 싶다. 앉아 있다 보면 눕고 싶다. 눕다 보면 영원히 누워 긴 잠을 자게 되는 게 인간이자 인생이다.

이렇게 줄어드는 욕망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것은 줄어드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과 욕심이 한계 없음을 나타내 주는 역설이기도 하다. 튀고 싶을 때 참는 것이 도(道)다. 또한 종교성(宗敎性)이다.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억울하게 감옥에 간 사람들도 있지만)은 참아야 할 때 참지를 못해 일을 저지르고 들어가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비극이다. 튀려고 할 때 자신을 잡아끌어 내리는 게 도(道)를 닦는 것이다.


도 닦는 것이 높은 산에 올라가 고목 나무 아래서 고고하게 살아가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시시각각, 순간으로 닥쳐오는 내 앞의 문제, 시간마다 만나야 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튀려는 자신을 ‘억 누르는 그 자체’가 도를 닦는 것이요 도인이 되는 길이다.

자유가 있고 방종이 있다. 자유는 자유 나름의 룰이 있다. 자유는 하기 싫은 것 하지 않는 자유도 있다. 그러나, 방종은 다르다. 방종엔 룰이 없다. 자유는 빨간 불일 때 서며 파란 불일 때 가는 코스모스, 즉 질서 속에 자유가 정말 자유다. 방종은 빨간 불이든 파란 불이든 상관 않고 튀어 나가려는 게 방종이다. 방종의 종말은 죽음이다.

튀고 싶을 때가 있다. 어디로 튈까. 튀어보아야 지구 안인데. 인간의 욕망과 욕심은 삶의 끝과 함께 가는 것 같다.


김명욱 <종교전문기자>
myongkim@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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