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난도 유산이다

2004-02-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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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집안,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명문대학을 나와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분명히 유산인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현상을 타파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집념으로 분투 노력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유산인 것이다.

나는 여덟살에 어머님을 여의고 열다섯에 아버님마저 돌아가셨다. 먹고 살기 위해선 길가에서 담배 행상, 생선장수를 하였다. 장사마저 시원치 않아 조그마한 빵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희망과 이상이란 의도적으로 멀리 하고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하여 빵공장에서 빵을 굽고 있는데 옆에 있는 선배가 “빵공장 기술자로 평생을 보내도 인생을 후회하지 않겠는가”고 물었다. “아닙니다 선배님, 이곳은 유망성이 없는 곳입니다. 돈이 모이면 다시 행상을 하려 합니다”고 말했더니 그러면 지금부터 공부를 하라고 했다.


“선배님, 저는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나의 동창생은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공부를 합니까” 그 선배는 말하기를 지금부터 A,B,C를 배워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하여 그까짓 것 사십에 대학을 들어가면 어떤가 했다.

나는 바로 이 길이 나의 길이라 생각되고 공장 주인에게 6시간 자고 18시간 일하는 시간 중에서 2시간을 할애받아 중학교 1학년생과 같이 학원에서 ABC를 배웠다.

빵공장에서 빵을 구우면서 영어단어, 수학 공식을 붙여놓고 외웠다.
2,30명 되는 같은 동료들이 미친× 하나 나왔다고 비웃었다. 그 때 동료들에게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되 돈이 없어 졸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모자 한 번 써보는 것이 나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악전고투 끝에 21살에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가마 타면 자가용 타고 싶다고 고등학교를 마치자 이제는 대학에 가자고 중앙대학, 중앙대학원,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게 되었다.

미국 비자는 받았는데 항공료가 없어 미국에 올 수 없는 처지였는데 뉴욕에서 항공료를 2년 안에 갚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 온 후 이틀 쉬고 남자 옷 다리미질 8시간을 쉴 새 없이 손발로 누르며 코피를 흘리는 막노동을 했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등록금을 낸다는 것은 요원했다. 그 때 고안해낸 것이 가발을 가지고 집집을 방문하는 가발 행상을 시작했다.

할렘에서 총 또는 칼로 위협을 받으며 10년이란 세월을 가발 행상을 했으며 여기서 또 각오를 다졌다. 돈을 벌어 금의환향 하느냐, 흑인들 너희들에게 맞아죽느냐 양자 택일하자고. 그러면서 뉴욕대학, 컬럼비아대학, 시티 유니버시티 학생들에게 가발 장사를 시켰다.

여름방학이면 1년 학비와 모든 비용을 벌 수 있었으며 7,80명의 석박사가 나왔으며 칼로, 도끼로, 권총으로 많은 사고가 있었는데 컬럼비아 대학원생 하나는 권총이 심장 옆을 지나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중앙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학장님을 뵈러 갔다. 학장님은 “자네 우리 빵공장 직공 아니었나? 어떻게 교수가 됐나? “ 했다. 나는 “학장님은 여고 영어선생님 아니었습니까?” 하고 서로 웃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지금도 가끔 아찔한 느낌을 갖는다. 빵공장의 그 선배, 그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의 생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의 생애 최고의 기쁜 날은 언제였을까? 고등학교 합격증을 받던 날이었으며 중앙대학 4학년 행정학을 강의하는데 여학생들의 꽃다발 증정이 있었다. 이 날이 스승의 날이었다.

고등학교 모자 한번 써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는데 과연 내가 대학교수가 되었단 말인가. 나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학하며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김차옥(중앙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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