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보의 아픈 고객

2004-02-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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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링컨은 말했다. 이 세상은 정의와 불의가 맞물려서 투쟁하고 있다. 이 말 속에 인간 역사의 한계성과 파라독스, 또한 인간의 아름다운 정과 창조성, 자유심상의 암시가 있다.

창조에는 인내와 꿈이 필요하다. 돌이켜 보건대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민족의 비극과 불행이 행복과 창조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불행과 회생의 파도를 거치면서 희망의 등대를 바라보며 꾸준히 노 저었으므로 가능했다.

역사의 뒷길에서 흘린 눈물과 피흘림, 그리고 그늘 속에 감춰진 저 수많은 바닷가 모래같은 희생, 그럼에도 목표를 향한 투쟁의 그 다리들을 끈질기게 지나 오늘 우리는 21세기의 뭍에 와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조국의 불행이 너무 길고 험하다고 은연중 때로는 짜증을 내고 휘몰아쳐 오는 무력감에 방관하고 손을 놓는다. 그럴 때 우리는 선한 역사가 꿈꾸고 소망하는 <아름다운 거기>를 지연하게 한다. 방관하는 자는 파도치는 물결에 스스로 침몰하지 않을지라도 타인을 물 속으로 빠지게 한다.

조국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태도는 커튼이 오르기 시작한 남쪽과 북쪽의 경악스런 참극과 어쩌면 엄청난 부조리 탓인지 모른다. 그리고 50년이란 길고 긴 세월… 그 세월동안 얼마아 큰 피눈물의 강물이 삼천리 강산을 적셨을까.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실망, 희망이 허물어져 내리는 절망과 아픔을 견뎌야 했던가. 때로 우리는 벽 앞에 서 있는 답답함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진행형이다. 밤길을 가는 나그네는 아침의 희망을 안고 내일의 태양을 예감하며 현재의 피곤과 두려움을 극복한다. 우리가 정의 편에서 순수행위를 한다면 삼천리 강산에 태양은 내일 분명 맑고 밝게 떠오를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를 씻으며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법을 버리며 악행을 고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으니…

공의와 불의가 맞물려 고통하며 극복하며 이어가는 인간 역사, 그러나 기차가 멀고 먼 거리를 달리는 것은 그가 가는 목적지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기차는 지름길을 가기 위해 선로를 이탈하지 않는다.

T. S. 엘리옷은 그가 젊은 한 때 아내의 병고와 금전문제 등으로 깊이 시달리면서 라고 말했다. 절망적인 현실 한 가운데서 희망의 꽃은 핀다. 인간의 불행은 희망의 답안지를 현재의 문제 속에서 찾지 않는 데 있음이 아닐까.

고통 후에는 분명 응당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 조국의 아픔의 보상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이럴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부정적 상념이 하나 있다. 삼천리가 시달리는 것은 분열에 있다는 그 사실. 아직도 비극의 참 그림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기심, 이것이 비극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정말 그림을 똑똑히 보고 있는가. 내가 그리는 그림이 진정한가. 물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방관자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방관자가 되지 않아도 되는 길, 그것은 어떤 것일까.

인간의 살아있음의 가치는 꿈과 희망의 고지를 향해 쉬지 않고 행하는 데 있다.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은 거기 맞는 사고와 정직하고 성실한 행위를 한다. 우리는 조국을 사랑함으로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 뿐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 행위에는 선로가 있다.

우리가 가는 과정이 그 날, 아니 오늘 우리 모두의 조국의 보상이 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진행형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본다. 남쪽나라를 가는 기러기의 비상의 아름다운 질서를 그리면서.

곽상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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