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용감한 사람들

2004-02-1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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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에서 육사 교장의 편지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면서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반응을 일으켰다. 이 편지의 내용은 지난해 11월 육사 교장이 육사 대강당에서 열린 <생도들과의 시간>에 육사 생도 1,000여명을 상대로 강연한 내용인데 강연 때도 생도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일반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젊은 세대들에게 50대와 60대가 겪은 아픔을 아는가 라는 말로 시작된 이 편지는 서독 광부와 간호원들의 고생, 가발 수출시대와 월남전 시대 등 근대화 과정에서 기성세대들이 겪은 고난을 열거하면서 반전평화데모로 가두를 마비시키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지난 세대를 폄하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지역 갈등과 보혁갈등 등 모든 갈등을 씻고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편지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떠나서 그의 말이 감동을 불러 일으킨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시점에서 현역 군인인 육사 교장의 이같은 말은 신선감을 더해준다.


우리는 과거 5천년의 역사를 말하지만 지금 우리의 가치관으로 볼 때 우리의 과거는 모두 부정하고 타도해야 할 대상에 해당한다. 역대 왕조와 제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모두 지배층이 백성을 착취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지상 이념인 민주주의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역사책은 모두 불살라버려야 하고 위인들은 매도해야 하며 경복궁 등 문화재는 모두 부숴버려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우리 민족은 한 때는 이런 체제, 또 다른 때는 다른 제도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점을 고쳐 나가고 좋은 전통은 계승 발전시켜 왔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것에 접목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사고, 제도, 생활방식을 정착시키는 것이 역사의 발전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역사 속에서 한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사명도 감당해 왔다. 우리가 지금 독재시대로 낙인 찍은 자유당 시대와 공화당 시대는 민주화 시대인 지금의 잣대로는 용납할 수 없는 시대이다. 그러나 한국의 건국 과정과 6.25 전후 과정에서 한미관계의 기틀을 마련한 이승만 정부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5.16 후 공화당의 장기 집권은 분명히 민주주의에 역행한 일이지만 한국의 산업화와 현대화의 초석을 다진 시대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독재자로 낙인 찍힌 박정희의 리더십으로 한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고 경제적 발전으로 국민의 교육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에 민주화가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사회가 발전하였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이 있다. 과거에는 조금만 진보적인 생각을 갖거나 말을 해도 좌익용공이라고 몰아부쳤는데 지금은 조금이라도 보수적인 생각을 갖거나 말을 하면 수구꼴통이라고 왕따시킨다.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이 이런 사정을 지적했다가 한겨레신문에서 흠씬 두들겨 맞은 적이 있었다. 추기경에 대해서 이 정도이니 누가 감히 말하려고 하겠는가.

지금 한국은 이른바 진보세력이 판을 친다. 곡학아세하는 사람들이 진보주의를 전매특허 받아 보수주의를 몰아세우는 것이 한국의 실상이다. 진보인지, 반미인지, 친북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여론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가운데 정부가 이런 여론을 등에 업고 이른바 개혁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질풍노도의 시대도 아니고 홍위병의 시대도 아니고 후일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하다. 이런 상태에서 누가 옳은 말을 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존 F. 케네디는 젊은 시절 ‘용감한 사람들’이라는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선거구 유권자들의 압력까지도 물리치면서 소신껏 일한 정치인들을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지금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젊은 세대의 비뚤어진 진보주의를 지적하면서 보혁갈등의 종식을 호소한 육사 교장은 분명히 용감한 사람이다. 지금은 이런 용감한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때이다.

이기영(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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