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파원코너] 미국의 관치금융?

2004-02-13 (금)
크게 작게
98년 9월23일 오후 1시 뉴욕 연방준비은행(FRB) 회의실에 월가의 내로라는 거물들이 모였다.

골드만 삭스, 메릴린치, 살로먼스미스바니, JP모건등 16개 투자은행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도열해 있는 가운데 윌리엄 맥도너 뉴욕 연준 총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하면 시장이 무너질 우려가 있습니다. 월가 은행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구제금융을 일으켜야 합니다.불만이 가득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어느 은행이 LTCM에 얼마나 많은 돈이 물려있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큰 회사는 3억 달러, 작은 회사는 2억 달러씩, 일괄적으로 모두 36억 달러를 조성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의 주먹구구식이지만, FRB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여파로 파산 직전에 몰린 LTCM이 살아났고, 뉴욕
금융가의 붕괴를 막을수 있었다.

미국 금융가에는 ‘팔 비틀기(arm-twisting)’이라는 말이 있다.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상업은행이든, 투자은행이든 팔을 비틀어 따라오게 한다는 말이다. FRB는 금리를 올리거나 내려 통화량을 조정하는 역할 이외에도 은행들을 규제하고 따라오게 함으로써 시장을 조절하는 기능을 한다.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말 한마디로 시장이 움직이는 것은 FRB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시장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의 외채 구조조정에서도 FRB가 개입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97년 12월24일 뉴욕의 맥도너 총재는 체이스 맨해튼, 시티, JP 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뱅커스트러스트, 뱅크오브뉴욕 등 6개 은행 CEO를 급히 불렀다. 연휴를 즐기고 있던 은행 대표들이 부랴부랴 양복을 꺼내입고 뉴욕 FRB 회의실로 들어왔다. 맥도너 총재는 한국 상황이 긴급하다.

외환보유액이 80억 달러밖에 남지 않았는데, 며칠이나 가겠는가.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맥도너가 자리를 뜬 뒤, 6개 은행장이 따로 모여 한국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다음해 1월 뉴욕에서 열린 외채협상에서 당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시티, 체이스, JP 모건의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이 원하는대로 해주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은 낮은 금리로 외채 만기를 연장했고, 한국 경제는 살아났다.

뉴욕 금융회사들은 FRB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한다. 한국 정부가 관치금융을 한다고 하지만, 미국 재무부와 FRB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시장이 평온할 때는 자율을 강조하지만, 시장이 왜곡되거나 붕괴 직전에 있을 때 FRB와 재무부가 개입한다. 87년 블랙먼데이때 당시 제럴드 코리건 뉴욕 연준총재는 주요 은행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투자회사에 돈을 풀라
고 으름장을 놓았다.

상업은행들이 증권회사에 돈을 풀자 주가는 회복했고, 블랙먼데이는 하
룻만에 종식됐다. 미국에선 FRB와 재무부가 개입하거나 지시할 경우 은행들이 합리적인 조정 과정을 거쳐 따라간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모두가 책임진다. 한국에선 정부나 감독기관이 지시를 하면 은행들이 따라가긴 하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의 강압에 의해 하는 수 없이 따라갔
다고 핑계를 댄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자율이 강조되면서 요즘은 은행들이 정부의 시장 안정 요구를 거부하는 사태마저 빚어지고 있다. 신임 이헌재 부총리가 취임 일성으로 이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시장은 철없는 어린애들의
놀이터가 아니며 시장 안정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이익만 추구하는 행위를 용납치 않겠다고 경고했다.

LG카드 처리과정에서 몇몇 시중은행들이 정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로 인해 시장 불안이 가중된데 대한 경고 메시지였다. 소비가 위축되고, 경기가 불황의 터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핵심에 막대한 카드채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시장이 무너지고 왜곡될 때 정부와 중앙은행의 개입은 당연하고, 은행이 이를 따라야 한다. 미국이 시장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재무부와 FRB가 뉴욕 월가를 확실하게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국 규제당국과 금융기관들이 알아야 한다.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inkim@koreatimes.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