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아내들

2004-02-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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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잘 해보십시오. 부인께서는 현재 무엇을 부인의 몫으로 가지고 계십니까?” “부인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뭘 좀 해보고 싶을 때 스스럼없이 쓸 수 있는 작은 것이라고 자기 것으로 가진 것이 있습니까?” “갖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시다면 버려라 비워라 하시는 부처님께서는 더 없이 좋아하시겠지만 그래도 사는 데까지는 재미있고 든든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살이 생활이 어디 그렇습니까?” “어느 정도는 내 것으로 가지고 있어야 마음도 든든하고 때에 따라 기분도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옷을 입어야 몸이 따뜻한 법이다.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서 입을만한 형편이 되면 뭔지 모르게 마음도 따뜻해 진다. 없는 쪽보다는 있는 쪽이 낫고, 있는 쪽 보다는 더 많이 있는 쪽이 훨씬 더 좋다. 있는 것도 내 명의, 그리고 내 손안에 있어야 그것이 내 것이고, 나를 거리낌 없이 편하게 해 준다. 있어야 행동하는 데에도 사는 데에도 자신에게 편하고 남에게도 당당하다.

현대는 경제가 얼굴이고 가정과 개인은 금력이 힘이다. 기분이 좋을 때의 남편들은 마음이 넓고 따뜻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라는 관념으로 가정을 꾸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인들이란 생활비 마저도 어찌 보면 남편들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아가면서 짜내야 하는 처량한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부인들이라고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능력도 있고, 하면 되는데도 대개의 부인들은 남편의 그림자를 밟고 기대어 산다. 남편이 남기는 어두운 그림자라도 내게는 보호일 것이리라 여기면서 남편의 선택과 지휘를 여과의 과정 없이 싫어도 따라준다. 남편만 있으면 된다.

그러니 상점을 직접 운영하면서 돈을 버는 부인들도 개인적으로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발이 저리도록 일을 하고 주급을 받는 부인들도 자기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다. 보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희생이다. 가정을 위하여, 시원치 않은 남편을 돕기 위하여, 또는 커나가는 아이들을 위하여, 나는 가진 것 아무 것도 없이 다 바쳤으니 없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겠지.

옛 말에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속담이 있다. 어느 날, 장사를 하는 중년의 한 부인이 “바쁘게 살았고 정신없이 장사를 했는데도 막상 나를 위해서 뭘 좀 해보려고 하니 내가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하면서 풀어진 눈동자를 허공에다 날리고 있었다.

그렇다. 되로 번 것 호기있게 얼굴 펴고 다 털어 아내에게 바치는 듯 하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얼굴을 말뚝으로 세우고 말로 달래가서 쓰는 남편 앞에서 부인은 주기만 하고 남편은 가져가기만 한다. 남편들은 쉽게 돈을 쓰지만 부인들은 어렵게 돈을 모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부인들은 실상 자기를 위해서는 가진 것이 없다.

가정에는 항상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사랑이 두터운 부부 사이에도 오늘 다르고 내일이 다를, 반갑지 않은 문제는 반드시 끼어 있다. 현명한 아내는 농속 깊은 곳에 금반지를 감추어 두고 미련한 아내는 금반지를 보란듯이 자랑하며 손가락에 끼고 다닌다. 없는 사람일수록 모으는 재미를 모르고 버는대로 헤프게 돈을 잘 쓰고, 있는 사람일수록 아끼면서 더 모으려 한다.

우리는 지금 경제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경제가 인격까지 포장하는 싸늘한 환경에 둘러싸여 생활을 하고 있다.남편의 능력 하나와 남편의 명의 하나에 등록 의존하고 남편의 그림자만을 밟고 따라다닌다면 극단의 피난처가 준비 안된 상태이고, 가정경제에 여유가 있더라도 꿈 많던 여인으로서 가정을 예쁘게 꾸며가는 부인으로서, 혹은 아이들의 든든한 어머니로서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자기 손에 가진 것이 없으면 욕망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은행 구좌도 하나쯤 따로 갖고 자기만의 세이프티 박스에도 자신의 미소와 가정의 미래를 위한 미소를 감추어 놓는 것이 어떠할까? 티끌 모아 태산이면 거기에 희망이 있고 모인 것이 보이면 거기에 미소가 있지 않겠는가?

김윤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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