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유령 유인물의 이름 도용

2004-02-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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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뉴욕한인사회의 일각에 어처구니 없는 유인물이 나돌았다. 뉴욕에서 비교적 큰 교회를 시무하고 있는 김 모, 장 모, 한 모 목사 등을 매도하는 내용이었다.

이 유인물의 제목은 ‘기자간담회 보고서’로 되어 있었고 정의구현 기자단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있었는데 기자단의 이름에 신문사의 편집국장, 종교담당 기자와 필자의 이름 석자도 들어 있었다. 이름이 들어있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도용 당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더구나 목회자들은 중상 모략하는 내용에 이름이 팔렸으니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사실은 객관적으로 보도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불편부당의 정론을 전개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이 유인물을 퍼뜨린 사람들은 언론의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특정인에 대한 비방 내용의 사실성과 그 주장의 타당성을 높이기 위해 기자들의 이름을 도용한 것 같다.


그러나 기자들은 언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사실을 전달하고 논평을 발표한다. 그것이 언론과 독자와의 관계이다. 언론인이 언론을 떠나서 어떤 파당에 가담하거나 어떤 주장과 영합하면 그것은 이미 언론인의 범위를 벗어나고 만 것이다. 기자들이 목회자의 비리를 알았다면 신문에 기사로 쓰지 결코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번 경우가 아니더라도 단체를 조직하거나 성명서를 발표할 때 이름을 도용 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회적으로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면 본인이 알게 모르게 이런 경우 들러리로 이름을 도용 당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나마 피해가 적은 편이다.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의 체면이 조금 깎이는 선에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남을 중상모략하는데 이름이 도용당하면 피해 범위가 엄청나게 커진다. 그 이름 때문에 중상모략을 당한 사람은 물론이고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도 남을 중상모략하는 비열한 사람으로 추락하고 만다.

말하자면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그 사람의 권위나 신용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대로 사람들을 오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위인데 그 주장이 나쁘면 나쁠수록 피해가 커진다는 것이다. 더우기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서 유포하는 중상모략은 일종의 비열한 테러행위라고 할 수 있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여 어떤 사람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9.11 테러에 비할 때 중상모략하는 사람은 테러범이고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은 무고하게 납치된 여객기이며 중상모략으로 피해를 받은 당사자는 WTC 건물에서 희생된 사람이 된다.

중상모략이 테러이며 테러 중에서도 나쁜 테러라는 것은 고전에도 있다.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에는 “중상하는 사람은 무기를 사용하여 상처를 입히는 사람 보다 죄가 무겁다. 무기는 가까이 있지 않으면 상대를 다치게 할 수 없으나 중상은 멀리서도 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고 되어 있다.

한인들에게는 장점도 많이 있지만 남을 헐뜯는 버릇은 아마 타민족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점이 아닌가 싶다. 두 사람만 모이면 남의 말을 즐겨 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남을 칭찬하는 말 보다는 헐뜯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제는 말로 부족해서 남을 비방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남의 이름까지 도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사람은 잘 났으나 못났으나 자기의 이름 석자는 떳떳하게 내세울 수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나 아무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 아무개는 ‘예스’ 또는 ‘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확신하는 사실이라면 무엇이 두려워서 남의 이름을 빌어 사람들을 오도하려고 했을까. 필시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중상모략이기 때문에 떳떳이 밝히고 나서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번 유령 유인물에 거론된 사람들은 결코 목회자들을 비판할 사람들이 아니다. 유령 유인물 자체가 남의 이름을 도용했고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들이 그럴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유령 유인물의 진실성은 거의 없다.

설혹 유인물에 열거된 목사들의 비행이 일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내용을 전달한 유인물의 비진실성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남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이처럼 어리석은 행위이다. 한인사회에서 이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이기영(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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