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부럼 깨물기와 더위팔기’

2004-02-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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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 풍속으로 ‘부럼 깨물기’가 있다.
이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땅콩이나 호두를 깨무는 것을 ‘부럼 깐다’고 한다. 부럼은 피부에 생기는 종기인 ‘부스럼’의 준말이나 정월대보름에 까서 먹는 밤, 잣, 호두, 땅콩 등을 이르는 말이다.

‘부럼 깨물기’는 부럼을 깨서 내는 소리로 못된 귀신을 쫓아내어 일년 내내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겨울 동안 영양 부족으로 생길 수 있는 부스럼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부럼을 먹어 피부에 종기가 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지혜가 깃들여있는 풍속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정월대보름이 매우 기다려지는 명절과도 같았다. 놀이도 많았고 먹을 것도 풍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정월대보름 추억으로는 부럼 깨물기 풍속과 더불어 쥐불놀이, 더위팔기 놀이 등이 가장 기억에 남아있다.


원래 정월대보름 쥐불놀이 풍속은 밤에 들에 나가서 논둑, 밭둑을 태우는 것이다. 이는 못된 귀신을 쫓고 쥐를 잡고, 마른풀에 나붙은 해충과 그 알을 죽일 뿐 아니라 타고남은 재가 다음 농사의 거름이 되어 풍년을 기원하는 소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도시에는 논둑이나 밭둑이 없고, 호박밭이 있었다. 때문에 대보름 밤에는 집 앞에 있는 호박밭에 동네 친구들이 다 모였다. 마른 호박 덩굴을 모아 불을 지피고 그 위로 주워온 나무들을 산더미처럼 쌓는다. 불길이 치솟아 오르면 그 위를 뛰어 넘으며 흥겹게 놀았다. 시간이 지나 나무가 타고남은 불씨를 못으로 구멍을 뚫고 철사로 길
게 손잡이를 만든 깡통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불씨를 담은 깡통을 돌리며 불놀이를 했다.

불장난을 할 때마다 쫄쫄이 바지를 태워 어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깡통에 불씨를 담아 돌리는 쥐불놀이야말로 요즘 말로 ‘재미 짱’이었던 것 같다.

’더위팔기’ 놀이도 참 재미있었다. 대보름 ‘더위팔기’놀이는 대보름 날 아침에 만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무심코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게’하고 말하여 더위를 파는 것. 이렇게 하면 그 해 일년 동안 더위를 먹지 않
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대보름 날 아침이면 우선 집에서 ‘부럼 깨물기’를 하고는 누나의 이름을 불러 더위를 팔았다.

학교에 가서는 친구들이 이름을 부르면 못들은 척 해야 했으며 친구를 불러 대답을 하면 얼른 ‘내 더위 사가라’를 외쳐야 했다. 그렇다고 한 여름 더위를 안 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들을 골탕(?) 먹이는 놀이로는 그 이상이 없었던 것 같다.

다양한 놀이만큼 먹을 것도 많았던 날이 정월대보름이었다.대보름 전날에는 쌀, 수수, 팥, 조 그리고 콩 등 다섯 가지 곡식을 섞어 만든 오곡밥을 먹었다. 호박고지, 박고지, 고사리, 고비, 고구마 줄기, 각종 마른 버섯, 시래기 등 묵은 나물들도 먹었다. 9가지 이상의 묵은 나물을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안 탄다고 믿었던 풍속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즘처럼 먹을 것도 다양하지 않고 좋은 음식도 많지 않았던 그 당시 그날만큼은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아침, 점심, 저녁 세끼뿐만 아니라 수시로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대보름 전날 세시풍속으로 ‘아홉 차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을 아홉 차례 읽어야 한다. 새끼를 꼬면 아홉 발을 꽈야하고, 나무를 하면 아홉 단을 해야한다. 빨래를 하면 아홉 가지, 물을 길으면 아홉 동이, 매 맞으면 아홉 대를 맞아야 한다. 그래서 오곡밥도 아홉 번 먹어야 한다는 풍속이다.

각설하고, 가정의 행복은 가족간의 허물없는 대화에서 싹튼다고 한다. 하지만 한인 가정은 대체로 가족간 대화가 부족한 편이다. 심지어 대화 소재의 빈곤으로 아이들은 컴퓨터만, 부모들은 비디오만 보는 가정도 꽤있다고 한다.

2월5일은 정월대보름이다. 한인 부모들은 대보름을 맞아 자녀들에게 대보름 풍속과 놀이를 들려주는 대화의 시간을 갖고, ‘부럼 깨물기’를 함께 하면서 한 해 동안 가족의 건강도 기원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창흠 편집위원
chye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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