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탓이로소이다

2004-02-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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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들고 나온 ‘동북공정’이 크나큰 민족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동북공정이란 중국 동북지방의 역사, 지리, 문화 문제를 중국적 차원에서, 시각에서, 그리고 엿장수 맘대로 유리하게 정립하겠다는 국가 주도의 대 역사라 한다. 그 타겟이 바로 고구려이다.

중국은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는 중국 영토 내의 많은 소수민족이 수립한 지방 민족정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한중 역사학자 토론회에서 중국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측 주장을 이렇게 받아쳤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조선민족이 신라 통일을 할 때 이를 지원한 중국에게 그 댓가로 고구려를 넘겨준 것이 아니오... 그것이 벌써 1300년의 일이요...”역사는 준엄한 것! 선조가 뿌린 씨를 지금 우리가 거두고 있다. 남의 탓이 아니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가슴을 내리치면서 말이다.


민족 인구의 반을 잃어버리고 민족영토의 4분의 3을 떼어 주고도 3국을 통일했다는 신라통일이다. 간략하게 그 실상을 뒤집어 본다.7세기, 40년대 중국에 당태종이 즉위하고 신라에는 김춘추(무열왕 640AD)가, 고구려에는 연개소문(642AD), 그리고 백제의 의자왕(641AD)이 등장한다.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왕권의 위협을 받은 신라는 당태종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쓰도록 신라 불교의 거성인 원광스님과 원효대승에게 명한다. 그러나 두 대승은 “내가 살기 위해 타의 힘을 빌어 이웃을 죽이려는 것은 승려의 길이 아니다”라며 왕명을 거역한다(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김춘추는 험준한 뱃길도 돌보지 않고 60 노구를 끌고 직접 당태종을 찾아가 대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군사 동원을 구걸했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당태종은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데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첫째는 고구려 땅에 당나라 군대의 영구 주둔과 둘째로 신라 왕을 당나라 황제의 친척으로 하고 왕비의 호위를 위한 당나라 군대의 신라 왕궁내 주둔(삼국사기 권5, 신라본지)한다.

당태종의 출범 조건은 김춘추에 의해 전폭적으로 수용되고 라당연합군에 의해 고구려(27BC-668AD)와 백제(5BC-660AD)는 망하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나라는 즉시 백제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땅에 ‘안동도독부’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개편하여 신라까지도 군정 통치 하에 두었다.

고구려를 치려다가 망해버린 수나라의 후신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당나라이다. 동쪽의 정벌이 그 때마다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좌절을 거듭하던 당나라가 신라에 업혀 그 뜻을 이룬 것이다.

나라가 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민족의 생존마저도 위협을 느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신라와 합세하여 당나라 침략군에 대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재기를 두려워 한 당나라는 잔인한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대륙의 곳곳에 분산, 이주시켜 단일민족으로서의 동질성을 차단하였고, 만주족을 통제하기 위한 바람막이로 만주족과의 사이에 고구려인 집단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당나라에 대한 항쟁은 줄기찼다.

이렇게 항쟁 30년! 고구려 유민은 옛 고구려땅에 발해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한다. 이렇게 조선의 삼국시대는 남북조시대로 이어간다.
지금 고구려가 두번 죽어가고 있다. 두번 죽어야 할 역사적 뿌리를 방금 우리는 더듬어 보았다.

역사의 시행 착오는 한 번으로 족하다. 두번 거듭할 때 그 민족은 생존할 자격이 없다. 한민족의 허리를 두 동강 내고 있는 38선이라는 국경선! 이대로 우리의 후손에 물려줄건지! 고구려의 비극을 되새기면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생각해 보자.

백춘기(골동품 복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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