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구려 역사와 중국

2004-02-0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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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현 중국영토인 길림성 집안시 고분군을 유네스코에 등록하기 위해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중국의 국책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추진하면서 한국의 고구려 유물,유적 답사단과 관광객을 차단하는 등 동북 3성(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을 장기적, 조직적으로 중국화하려는 포석을 두고 있다.

집안의 고분군은 이미 북한이 지난 2001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신청한 곳이다. 집안(集安)은 세계 최대의 고분지역으로 장군총, 천추총, 태왕릉, 서대총, 무용총, 쌍영총, 형총, 제총 등 무덤 외에도 산성하 고분구, 우산하 고분구, 칠성산 고분구 등 현재 남아있는 고분이 1만2,000개나 넘는 무덤들로 가득 차 있다.

저 멀리 유라시아 알타이산에서부터 시작된 적석총은 몽골초원을 건너 고조선의 요서, 요동, 고구려의 만주일대를 수놓았다. 고구려 초기부터 5세기까지 이어진 적석총은 중국의 무덤 형식인 봉분제가 도입된 후부터 고구려 말까지 봉토석실묘가 유행하였다.


무덤 형식이 다른 것은 무덤 주인공의 풍습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고 풍습이 다르면 무덤 주인공이 다르다는 것이다. 집안시 고분군은 중국 화하족(華夏族)의 토광분묘제와는 다른 축조과정을 거치고 생겨난 고구려인들의 무덤들이다. 35개의 나라가 나타났다

사라졌던 중국과는 달리 고구려는 705년 동안 매년 20여개의 무덤을 축조했다. 왕이나 왕족 그리고 귀족들의 무덤들에는 많은 벽화가 있어 그 시대의 생활상에서부터 인물, 동물 행렬, 수렵놀이 등과 정치, 종교에 관한 것들을 알 수 있다. 왕이나 특수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내지(內地)
무덤에서는 보기 힘든 양식들로 고구려인들이 중국의 화하족과 다른 갈래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는 당나라에 고구려가 패망한 지 500년이나 지난 고려 인종 23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신라, 백제와 함께 나타난다. 삼국사기는 당시에 있었던 해동고기, 삼한고기 등 한국 사서와 삼국지, 남북사, 수서, 신당구서 등 중국 사서들을 참고하여 편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인에 의해 고구려 시대를 기록했던 유기(留記) 100권과 이문집이 편찬한 신집(新集) 5권은 애석하게도 아직 한권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쉬운대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 역사에다 고구려 강역에서 발굴된 유물 유적을 대입하면 보다 선명하고 채색된 고구려 역사를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유목민족에서 농경국가로 정착되어 가고 있었지만 중국인들의 눈에는 흉노나 노환, 선비같은 오랑캐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칼과 창같은 병기를 잘 써서 전투에 능하다고 보였다.

실제로 고구려인들인 덕흥리 수렵도, 무용총 같은 장면들이 보여주듯 호전(好戰)적이었다. 장수왕 시대를 제외하고 고구려는 인접국가와의 전쟁을 수시로 벌였다.고구려인은 머리를 풀어내렸거나 상투를 틀어 올렸으며 활 쏘기에 편리하도록 옷의 오른쪽 깃을 왼쪽으로 여미었으며, 말 타기에 용이한 바지를 입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중국과 다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고조선, 숙신, 읍루, 삼한도 상투를 틀고 바지를 입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치마를 입었다. 당시 치마(裳)는 중국 남자들의 옷이었다.바지와 저고리, 당나라 염립본이라는 왕실 화가가 그린 당태종 왕실 행사에 참석했던 고구려, 신라, 백제 사신의 의상이 모두 똑같은 형태의 바지와 저고리인 것은 무엇을 뜻함인가.

고재선(브루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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