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택 족보’캐는 업체 호황

2002-08-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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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집의 내력은무엇일까?

호기심 많은 주택 소유주들 나날이 증가
수백~수천달러 비용불구 25~50% 의뢰 늘어


몇년 전 리버사이드 대규모 주택단지에 집을 산 한인은 하마터면 평생 얼굴도 모르는 ‘농부’에게 문을 열어줄 뻔했다. 수십년 전 이 지역에 살던 미국인 농부가 주택업자에게 땅을 팔면서 맺은 계약에는 ‘향후 이 지역을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조항이 명시돼 있었던 것. 다행히 계약 전 이것을 확인한 부동산 에이전트가 이 조항을 삭제하고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낯모르는 농부에게 평생 문을 열어줄 필요는 없었다.

이 조항을 삭제하지 않고 입주한 이웃들은 이 농부의 방문을 법적으로 거절할 수 없다고 한다. 지난 94년 모레노밸리에 살던 어떤 한인은 밤마다 출몰하는 유령 때문에 이사를 결심했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망설인 끝에 한인 바이어들에게 이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냈고 모두들 계약을 꺼려했다. 결국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미국인이 이 집을 구입했다.


수년 전 한인 여성이 목매 자살한 집이 매물로 나왔는데 처음에 집 자체를 마음에 들어하던 한인들은 이 얘기를 듣자 구매를 포기했다. 집은 이 문제를 개의치 않는 미국사람에게 팔렸다고 한다.

과연 내가 사는 집의 내력은 무엇일까? 예전엔 누가 살았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오래된 집을 새롭게 단장해 입주하는 경우도 늘어나면서 수십년에서 많게는 수백년된 집의 ‘족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워싱턴 DC에 있는 전문업체 ‘켈시 앤드 어소시에이츠’는 호기심 많은 집주인들 덕택에 주택에 숨겨진 얘기를 연간 100여건 정도 캐고 있는데 이는 99년에 비해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하우스 히스토리안’(House Historian)이라고 불리며 미 전역에서 이와 유사한 업무를 담당하는 업체나 개인들도 몇 년 사이 평균 25% 가량 늘어난 업무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들 업체를 통해 집 내력을 조회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자신의 집이 예전에 술집은 아니었는지 혹시 숨겨진 유령이야기는 없는지 가장 궁금해한다고. 물론 갱 두목이 살던 범죄의 소굴이었는가를 묻는 경우도 적지 않고 의미 있는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기도 한다.

시카고의 1891년생 벽돌건물 콘도를 구입한 한 여성은 이 집이 예전에 악명 높은 마약 딜러의 근거지였다는 소문을 듣고 기분이 찜찜해 사실 확인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우스 히스토리안을 고용하는 비용은 수백달러에서 수천달러까지로 결코 만만치 않다. 이들의 작업은 우선 먼지 쌓인 다량의 법원 기록을 입수하는 것과 옛날 신문과 센서스 자료 등을 뒤져 세월에 덮인 흔적들을 찾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수집된 기록을 통해 자신의 집이 1898년 골드러시 시절에 도박 빚으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남북전쟁 당시 군용병원으로 쓰여진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자료 수집이 끝나면 그동안 집의 소유주가 몇 명이나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설계도면 등을 통해 집의 보수와 신축 여부도 세밀하게 점검한다. 주택의 초창기 구조는 숨겨진 족보를 밝히는데 결정적 구실을 하기도 한다.

1890년대에 지어진 한 집은 당시 도면상에 여러 개의 침실은 있으나 제대로 된 주방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집의 용도가 일반 가정집이 아닌 접대부가 있는 술집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단계는 과거의 입주자나 그들의 선조들을 직접 만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 사람들 사이에 구전돼 온 이야기들이 자료보다 훨씬 흥미로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유서 깊은 집들이 많은 뉴올리언스는 미국 내에서 하우스 히스토리안들이 가장 바쁜 동네로 꼽히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곳이다.
일부 부동산 에이전트들은 주택의 족보를 좋은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버지니아주의 경우 1925년 이전에 지어진 집은 스퀘어피트당 140달러 이상을 호가하는데 역사적인 특징이 있거나 집 상태가 양호한 경우 새 집의 두배에 달하는 가격을 받고 있다.

집의 과거를 조사해도 아무런 얘깃거리가 없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뭔가가 나올 경우 많은 사람들이 집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다고 하니 한번 해보는 것도 좋을 듯.

한편 부동산법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집에서 사망자(자연사 포함)가 발생한 경우 부동산 에이전트와 셀러는 이 내용을 바이어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거래가 형성된 경우 바이어는 언제든지 계약 자체를 파기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이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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