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출근길 주유소 앞에서 한 남자가 멈춰 선다. 오른 가격표를 보며 한숨을 쉰다. 그의 하루는 흔들린다. 점심값을 줄일지, 아이 학원비를 미룰지, 카드값을 다음 달로 넘길지 계산이 시작된다. 전쟁은 화면 속 이야기 같지만 그 여파는 이미 식탁과 가계부에 도착했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 아이가 무너진 건물 잔해 옆에 앉아 있다. 학교는 사라졌고 친구는 보이지 않는다. 폭격은 멈추지 않았고 어른들은 아이를 보호할 힘이 없다. 이 아이의 하루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이 두 장면을 동시에 산다. 하나는 불편함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의 문제다. 그러나 오늘의 세계는 이 둘을 같은 언어로 다루지 않는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를 묻는 자리에서 아이들의 죽음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은 유가와 주식시장이다. 이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고 분노하게 한다.
국제사회는 전쟁 속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세워왔다. 유엔 아동권리협약과 제네바협약 추가의정서는 말한다. 아동은 특별히 보호되어야 하며 민간인을 향한 공격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학교와 병원은 보호 대상이며 아이들은 전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국제법으로 명시된 약속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를 반복해 배반한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국제법은 문서 속에 남고 아이들은 폐허 속에 남는다. 세계는 이 비극을 끝내려 하면서도 출발점을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경제적 압박에서 찾는다.
이것은 특정 지도자의 악의가 아니다. 이것은 구조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교환 가능한 가치로 환산한다. 전쟁도 생명도 아이의 울음도 비용-편익의 언어로 번역된다.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 물신주의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사물 사이의 관계로 대체된다. 우리는 아이의 죽음에 분노하기 전에 스마트폰을 열고 유가와 주식 앱을 먼저 확인한다. 전쟁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환율과 주식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 질서 안에 앉아 있는 것이다. 분노하기 전에 계산하고 슬퍼하기 전에 손익을 따진다.
유가가 오르고 물가가 상승하며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 비로소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기업의 비용이 증가하고 소비가 위축되며 정치적 부담이 커질 때 협상이 시작된다. 전쟁은 인간의 비극으로 시작되지만 종식은 종종 경제적 계산으로 이루어진다. 오늘의 세계 질서는 생명이 아니라 비용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아이들의 울음은 전쟁 종식 협상의 속도를 높이지 못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은 유가와 주식 그래프다.
권력은 언제나 질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전쟁을 통해 유지되는 질서, 시장을 통해 조정되는 질서, 그 과정에서 먼저 무너지는 것은 늘 가장 약한 이들의 삶이다. 아이들, 난민, 노동자, 서민. 그들은 질서의 대상이 아니라 비용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주식시장인가, 유가인가, 아니면 무고한 자들의 생명인가.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경제를 상상한다. 희년의 법은 빚을 탕감하고 땅을 돌려주었다. 초대 교회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 예수의 오병이어는 결핍의 경제 앞에서 나눔의 경제를 보여주었다.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는 말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상상력을 지키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할 때 교회는 생명, 존엄, 아이의 웃음을 중심에 두는 공동체여야 한다. 세상이 유가와 주식 그래프로 전쟁의 종식을 계산할 때 교회는 아이의 얼굴로 평화를 상상해야 한다.
전쟁을 멈추게 하는 이유가 경제가 아니라 생명이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다른 질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이 질문은 남는다. 누가 이 질서를 만들고 있으며 그 대가는 누가 치르고 있는가.